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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Jul 26. 2023

<5> 시간이 덜어주지 않는 슬픔은 없다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한다.”

-빈센트 반 고흐(네덜란드 출신 화가)의 좌우명


서양 미술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살아생전 그다지 ‘성공한 화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림이 팔리지 않아 죽는 날까지 가난과 싸워야 했다. 공식 확인된 바로는 ‘붉은 포도밭’을 400 프랑에 단 한 점 팔았을 뿐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런 얘기들이 전해 내려오는 이유다.


“파리 경매 시장에서 그림 10장을 50 상팀(커피 두 잔 값)에 팔아야 했다.” “고물상에 그림을 팔았더니 상인이 물감을 긁어내고 중고 캔버스로 팔아넘겼다.” “어떤 노인에게 빌린 돈을 갚으려고 그림 한 수레를 보냈더니 받은 것으로 하겠다며 모두 되돌려 보냈다.”


과장된 얘기겠지만 그림을 제대로 팔지 못한 건 사실이다. 화상인 동생에게 평생 경제적으로 의존한 이유다. 27세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불과 10년 만인 37세에 생을 마감하는 바람에 이름을 알리는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사후 30년이 채 안돼 불세출의 명성을 얻었지만 생전에는 칭송받지 못한 게 분명하다.


고흐는 사랑을 얻지도 못했다. 짝사랑에 울어야 했다. 20세 무렵 런던에서 화랑 일을 할 때 약혼자가 있는 하숙집 딸을 연모해 청혼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상처와 후유증이 매우 컸다. 28세 무렵에는 남편과의 사별로 슬픔에 빠진 외사촌 누나에게 사랑을 애걸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랑에 실패한 고흐는 임신한 매춘부와 동거하게 되고, 이 때문에 부모형제들로부터 세찬 비난을 받아야 했다. 매춘부와 헤어지고 나서는 죽을 때까지 혼자였다. 당연히 남겨진 자녀도 없다. 


고흐의 37년 짧은 삶을 살펴보면 기쁠 일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는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목사가 되어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제하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럼에도 기독교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하던 고흐는 렘브란트처럼 성화(聖畵)를 열심히 그리는 것도 괜찮은 전도방법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즈음 그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멋진 문장 하나를 좌우명으로 삼게 된다.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한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는데 평생을 바친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이다. 그에게 딱 맞는 좌우명인 것 같다. 이 순간 슬픔이 크지만 기쁜 마음으로 전력을 다해 좋은 그림을 그리겠다는 격한 다짐으로 들린다. 


고흐는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정신질환으로 자주 발작을 일으켜 여러 차례 정신병원을 드나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붓은 한시도 놓지 않았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 거의 대부분이 정신질환 중에 그렸다는 사실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슬픔 속에서 기쁨을 찾는 위대한 예술가의 혼을 본다. 그러나 가난한 화가는 동생한테 계속 생활비를 지원받아야 하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나이 예순만 넘겼어도 생전에 크나큰 영광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이 덜어주지 않는 슬픔은 없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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