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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Mar 28. 2024

<92>셈페르 에어뎀(Semper eadem)

엘리자베스 1세(잉글랜드 여왕)의 인생 좌우명

대영제국 기틀을 마련한 여왕의 소신과 품격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은 16세기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결혼을 하지 않는 대신 미모 가꾸기에 많은 것을 투자했다. 특히 보석을 무척 좋아했다. 걸어 다닐 수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온몸에 묵직한 다이아몬드와 진주를 휘감아 치장했다. 


그녀의 보석 컬렉션은 당대 유럽 최고 수준이란 평가를 받았으며, 이를 근거로 궁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란 말 듣는 것을 즐겼다. 그런데 갖가지 보석에는 자기 좌우명인 ‘셈페르 에어뎀(Semper eadem)’을 새겼다. 라틴어로 ‘항상 같다’라는 뜻이다. 


엘리자베스는 왜 이 문구를 좌우명으로 삼았을까? 어린 시절 겪은 고초와 시련, 왕좌에 오른 뒤의 개인적, 정치적 처세를 살펴보면 짐작이 간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주변 환경이 워낙 엄혹해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를 지경이었다.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불투명하기 짝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약속과 원칙을 천금같이 지켜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녀는 헨리 8세 왕과 두 번째 부인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앤은 첫 번째 왕비 캐서린의 시녀였다. 한때 왕이 무척 사랑한 여인이었으나 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유로 사랑이 식어 엘리자베스가 세 살일 때 간통죄 누명을 쓰고 참수형을 당한다. 동시에 엘리자베스는 사생아 취급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낙담하지 않고 조용히 스스로를 갈고닦아 역사와 철학에 심취하는가 하면, 언어를 6개나 익혔다.


왕이 된 이복 언니 메리 1세와는 비교적 원만한 관계였다. 그러나 개신교를 무자비하게 박해하던 메리가 엘리자베스도 개신교를 믿는 것으로 의심해 런던탑에 가두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풀려난 그녀는 정쟁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시골로 내려가 근신했다. 


메리 1세가 재위 5년 만에 죽고,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그녀는 두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결혼을 하지 않는 것과 종교 탄압을 하지 않는 것. 결혼은 개인이나 국가를 위해 별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종교는 메리 1세와 정반대로 개신교(성공회)를 국교로 지정했으나 가톨릭을 탄압하지는 않았다. 무려 45년 동안 왕좌를 지키면서 두 가지는 비교적 잘 지켜졌다. 초지일관(初志一貫)이자 ‘셈페르 에어뎀’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재위 기간 중 잉글랜드를 유럽의 극빈국에서 최강국으로 탈바꿈시켰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해 대양 진출의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아메리카를 비롯한 식민지 개발에 박차를 가한 덕분이다. 영국 역대 군주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이유다. 이런 업적은 좌우명 ‘셈페르 에어뎀’ 덕분인지도 모른다. 국가 지도자의 사생활과 정책의 일관성은 당연히 국정을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항상 같다’라는 말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초지일관은 물론 소신, 표리일체일 수도 있다.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도 유용하지만 미래가 온통 불투명할 때도 필요한 덕목이다. 어둠 속에서라도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소신을 갖고 전진하는 것이 최선이다. 얄팍한 생각에 갈대처럼 흔들리는 사람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안과 밖이 다른 사람한테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셈페르 에어뎀’은 품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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