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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처럼 Apr 04. 2024

<96> 변하지 않는 것으로 만 가지 변화에 대응한다

호치민(베트남 초대 국가주석)의 인생 좌우명

원칙을 지키되 유연함을 실천했던 베트남 국부(國父) 


 

베트남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새나라 건설의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 약 100년 동안 식민 지배했던 프랑스가 일본 빈자리에 들어와 다시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대응에 나선 해방 정국 지도자 호치민(1890~1969)은 베트남이 프랑스연합 내 인도차이나 연방의 일원으로 제한된 주권을 인정받는 내용의 협정에 서명했다. 완전한 독립을 원하던 국민들은 굴욕적인 협정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호치민을 ‘민족 반역자’라고 몰아붙였다.


호치민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는 명분보다 현실이 중요하다며 국민을 설득했다. 100년을 지배한 프랑스보다 1000년을 지배했던 중국을 더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핑계로 하노이에 진주한 중국(국민당)군을 철수시키려면 프랑스를 적절히 이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평생 중국인의 똥을 받아먹는 것보다는 잠시 프랑스인의 똥 냄새를 맡는 것이 낫다.” 


호치민은 사고가 유연했고, 시대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줄 알았다. 이후 프랑스가 약속을 위반하자 그는 곧바로 전쟁에 돌입했으며, 결국 1954년 프랑스를 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완전한 독립’이라는 대원칙은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국내외에 과시한 것이다. 이런 정치 철학은 그의 인생 좌우명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이불변 응만변(以不變 應萬變)’이 그것이다. 변하지 않는 원칙을 바탕으로 모든 변화에 대응한다는 뜻으로, 그가 평생 간직했던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이 철학은 이후 베트남이 미국과의 기나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데 이어, 중국의 침략을 어렵지 않게 격퇴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베트남인들은 생각하고 있다. 이런 정신은 통일 후 베트남 정부가 개혁개방 정책을 이끄는 통치 철학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 부흥을 위해 총부리를 겨눴던 미국, 한국과 적극적으로 우호 관계를 맺는 것도 그 일환이다.


호치민의 좌우명이 지금도 베트남인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그가 칭송받아 마땅한 훌륭한 국가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평생토록 조국 독립을 위해 애썼을 뿐만 아니라 통일을 위해 전심전력 했으며, 누구보다 검소한 삶을 살았기에 베트남인들은 그를 국부(國父)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원칙을 지키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호치민의 생각은 비단 국가 통치 철학으로만 유용한 게 아니다. 개인의 인생살이에도 더없이 중요한 덕목이다. 급변하는 세상에 살면서도 기존의 제도와 전통을 존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또는 예상치 못한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는 이유로 변화를 거부하면 발전을 담보하기 어렵다. 발전은커녕 뒤처지기 십상이다. 마냥 안전지대에 머무는 것은 퇴보를 의미한다. 


지금 우리는 기술폭발, 정보폭발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세상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려는 마음가짐과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은 성공을 일구고 미래를 준비하는데 필수적인 자질이다. 행동을 견인하려면 우선 생각부터 바꾸어야 한다.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창조한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과정이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지 않고서는 우리의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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