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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0년간의 몰입 연구로 세계적 나비학자가 되다

-송도고보 시절 놀기에 정신 팔려 공부엔 꼴찌였던 석주명

by 물처럼

*석주명(1908~1950)= 평양 출생. 한반도와 일본, 중국을 돌며 평생 75만 마리의 나비를 채집하여 연구한 생물학자. 조선 나비의 계통 분류 완성.



‘나비 박사’ 석주명은 일반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위대한 학자다. 그는 대학 교수도, 정식 박사도 아니었다. 일제시기 중학교 생물교사를 역임하고, 광복 후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 부장을 지냈기에 세속적으로 크게 출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학자로서는 생물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다. 특히 나비 연구에 관한 한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놀기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중학교 시절 학교 성적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인생 목표가 정해진 것을 계기로 그것을 이루는데 집중하고 몰두함으로써 무서운 능력을 발휘했다.


석주명은 평양의 큰 요릿집 아들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별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4년제 보통학교(초등학교)를 다닐 때 그는 공부보다는 놀기를 좋아했다. 동물을 끔찍이 좋아해 각종 동물을 아버지 몰래 사와 집에서 기르곤 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 5년제 평양 숭실고보에 진학해서는 학교 수업보다 연극이나 악기 연주에 더 관심이 많았다. 연주에는 상당한 재능을 보이기도 했다.


석주명 연구의 대가 이병철이 쓴 ‘석주명 평전’(그물코, 2011)에 따르면,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 만돌린을 처음 배웠으며, 짧은 수련 기간에 비해 연주 솜씨는 아주 뛰어났다. 만돌린을 기타로 바꾸어 이후 12년쯤 쳤는데, 한때는 기타 연주가로 일생을 보낼 꿈을 품기도 했다. 훗날 애국가를 작곡한 숭실고보 동창생 안익태 등과 어울려 시내 교회를 돌며 연주하는 걸 즐겼다.


그는 숭실고보 재학 1년여 만에 동맹휴학 사태가 벌어지자 개성의 송도고보로 전학했다. 그곳에서도 공부는 뒷전이었다.


“석주명은 어머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말썽꾸러기 노릇만 했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성격이 활달하고 집안이 여유가 있다 보니 자연히 노는 쪽으로 정신을 팔았다. (중략) 쉬는 날은 쉬는 날대로 친구들과 어울려 개성 근처 명승지로 놀러 다녔으니 성적이 좋으면 도리어 이상할 지경이었다.” ‘석주명 평전’에 나오는 기록이다.


1924년 12월, 평양에 돌아가 겨울방학을 신나게 즐길 생각에 잠겨있던 석주명은 4학년 성적표를 받아 들고 충격에 빠졌다. 전체 성적은 반에서 꼴찌였고, 어떤 과목은 낙제를 받아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부모님 뵐 면목이 없어 평양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다행히 이를 계기로 그동안의 놈팡이 생활을 청산하고 학업에 몰두했다. 송도고보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는 일본의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농학과에 입학했다가 2학년에 올라가면서 박물학과(오늘날의 생물학과)로 옮겼다. 졸업 후 중학교 박물교사를 할 생각이었다. 학교에서 곤충과 식물 병리를 주로 공부했지만 처음부터 나비를 연구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나비 연구는 은사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나비 연구에 관심이 많았던 오카지마 긴지 교수는 졸업을 앞두고 석주명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역시 ‘석주명 평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자네, 조선 나비를 한번 연구해 보게. 그 방면은 아직도 미개척 분야나 다름없으니 이제부터라도 머리 싸매고 노력한다면 자네의 학구 태도로 보아 충분히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을 걸세.”


축산에 관심이 많았던 석주명이 주저하자 오카지마 긴지 교수는 이런 말로 다그쳤다.


“자네는 조선 사람 아닌가. 마땅히 남이 손대기 전에 자네 힘으로 조선 나비를 연구하는 것이 옳지 않겠나. 내가 장담하지만 10년만 죽어라고 하면 틀림없이 자네는 조선 나비에 관한 한 세계적인 학자가 될 수 있을 걸세. 자, 그런데도 주저할 텐가?”


석주명은 “죽어라고 10년만 하면 된다”라는 은사의 말에 마음이 확 끌렸다. 귀국한 뒤 함흥 영생고보에 이어 모교인 송도고보 박물교사로 부임하면서 그의 나비 연구는 본격화된다. 이후 나비 채집 활동은 한반도 최북단인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동에서부터 최남단인 제주도 남쪽 마라도 까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나라 밖으로도 일본과 몽골, 사할린, 만주, 대만 등지로도 쏘다녔다. 식민지 중학교 박물교사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적극적이고도 진취적인 현장 연구였다.


송도고보에 재직한 11년 동안 그는 79편의 나비 논문을 발표해 세계적인 학자로 인정받았다. 논문을 설렁설렁 쓰는 법이 없었다. 예를 들어 1936년 ‘배추흰나비의 변이 연구’ 논문을 작성하면서 무려 16만 마리의 나비를 분석했다. 30대 젊은 학자가 국제 학계에서 통용되던 만국명명규약의 허점을 밝혀내고, 세계적인 학자들이 붙인 학명 1000여 개를 엉터리라고 당당하게 말소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연구 역량과 열정 덕분이라고 해야겠다.


석주명은 단순히 조선의 ‘나비 박사’가 아니다. 당대 국제 학계가 인정한 전문 나비 연구가다. 일본 전문대학의 은사가 전해준 ‘10년 공부의 힘’을 믿고 연구에 몰입한 결과 목표를 이룬 것이다. 그는 송도고보 재직 시절 제자들에게 이 말을 즐겨했다고 한다.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남이 하지 않는 일을 10년간 하면 꼭 성공한다. 세월 속에 씨를 뿌려라. 그 씨는 쭉정이가 되어서는 안 되고 정성껏 가꿔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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