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교 때 낙제를 두 번이나 당한 부실 학생,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게르하르트 하웁트만(1862~1946)= 독일의 극작가, 소설가.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으로 ‘직조공들’ ‘침종’ 등이 유명함.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작가는 대부분 어릴 적부터 조금이나마 문재(文才)를 드러낸다.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쉽사리 책을 읽거나 뭔가 쓰는 것을 좋아한다. 학교에서 다른 모든 과목을 내팽개치면서도 글쓰기에는 특별한 관심과 능력을 보이곤 한다. 문학적 재능은 일정 부분 타고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이 자랑하는 작가 게르하르트 하웁트만은 오랫동안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다. 10대 때는 학업 능력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는 열등생이었으며, 20세 전후해서도 잘하는 분야가 아무것도 없었다. 훗날 노벨 문학상을 받고,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웁트만은 독일 슐레지엔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호텔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멍청한 아이’라고 불렸다. 선생님들한테 “정신 차려”라는 말을 수없이 듣고 자랐다. 11세 때 고향 브레슬라우에 있는 6년제 레알슐레(실업계 중고교)에 진학한다. 부유한 집 자녀가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9년제 김나지움(인문계 중고교) 대신 굳이 레알슐레에 입학한 것을 보면 성적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적은 레알슐레에서도 좋지 않았다. 아니 엉망이었다고 해야겠다. 게르하르트 프라우제의 책 ‘천재들의 학창시절’(엄양선 옮김, 황소자리, 2012)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입학할 때부터 그는 ‘아주 부실한 1학년 생’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매우 부드러운 표현이었다. 하웁트만의 성적은 그야말로 바닥이었다. 낙제를 두 번이나 해서 가까스로 3학년에 올라갔을 때는 그의 나이가 16세였다. 천신만고 끝에 졸업장을 받자마자 그는 서둘러 학교를 떠났다.”
하웁트만은 삼촌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농사일을 배웠으나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 흥미가 없어 그만두게 된다. 군대에 관심이 있어 프러시아 제국 육군 군속시험에 응시했으나 그마저 떨어지고 말았다. 방황 끝에 조각가가 되려고 브레슬라우에 있는 왕립예술직업학교에 들어가 2년간 다녔다. 이후 형과 함께 이탈리아로 장기 여행을 떠나 조각가로 1년 남짓 살았지만 그마저도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독일 드레스덴으로 돌아온 하웁트만은 그곳 왕립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인생은 아주 불투명했다. 하지만 23세 때인 1885년 이후 베를린에 살게 되면서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탈리아에 머물 때 나폴리 빈민굴 등을 둘러보고 처음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이 계기가 되었다. 베를린의 젊은 시인과 전위작가, 철학자들과 어울리며 마르크스, 입센, 톨스토이를 논하고 글쓰기를 본격화했다. 그즈음 부유한 여인을 만나 결혼함으로써 정신적 안정을 되찾은 것이 작품 활동에 도움이 되었다.
그는 이제야 자신감을 갖게 된다. 농사일도, 조각도, 그림도 자기 일이 아님을 새삼 확인하고 오로지 문학에 몰두했다. 27세 때 발표한 희곡 ‘해뜨기 전’이 그의 처녀작이다. 이는 자연주의 문학 운동의 개막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받았으며, 연극으로 상영되자 인기가 대단했다. 이로써 학업 열등생으로 낙인찍혔던 하웁트만은 하루아침에 유명 작가로 거듭났다.
자신감은 작품 활동에 가속도를 붙였다. 50여 편의 희곡과 장편 및 단편소설, 시 등을 마치 증기기관차처럼 쏟아냈다. 특히 31세 때 발표한 대표작 ‘직조공들’은 독일 슐레지엔 지방에서 실제 일어났던 직조공들의 반란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그를 당내 최고의 작가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