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버스 140번을 탔다. 버스 뒤쪽에 자리를 잡고 좌석에 몸을 맞춘다. 가방을 내려 무릎에 올리고 '바림(우종영)을 펼친다. 서울시내 간선버스의 번호체계에 따르면 1은 종로지역을, 4는 송파지역을 나타내므로 이 버스는 서울을 동남쪽에서 북동쪽으로 횡단하여 운행하는 노선이다. 강남역을 출발한 버스는 한강을 건너 남산을 관통하며 1호 터널을 지난다.
을지로를 건너면 청계천이 좌에서 우로 흐른다. 근무지가 인공폭포가 떨어지는 청계천 시점에 있었던 나는 점심 후 청계천 변을 따라 산책하곤 했다. 어느 날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에 쏠려 있었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흰색 백로 한 마리가 움직임을 최소화한 채 사냥 자세로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백로는 피라미 사냥에 성공하였고, 그것을 숨죽여 지켜보던 사람들은 백로에게 환호와 손뼉을 쳐 주었었다. 하천을 건너면서 종로를 만난 버스는 우회전하고, 탑골공원을 거쳐 종로 5가를 지나면서 오른쪽 차창에 광장시장이 어리 비친다. 육회와 매실주로 낮술을 즐기는 우리 모습도 스쳤다.
광장시장을 지나 좌회전한 버스가 커다란 버즘나무가 늘어서 있는 대학로로 접어든다. 순간, 시간이 뒤로 쭉 밀려난다. 그리 크지 않은 칠엽수가 살고 있던 마로니에공원에 서 있는 젊은 남녀가 창문 유리에 나타난다. 자기감정 표현이 서투른 그녀는 애교가 가득한 감성으로 교감을 나눠주길 원하는 그의 요구를 감당하기 버거웠다. 그들은 봄의 허리쯤이었던 계절의 대학로에 데이트를 나왔고, 그곳의 문학적 분위기에 고무된 그는 그러지 못하는 그녀에게 불만을 토했을 것이다. 그날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착해서 하얀 무명옷 같던 그녀는 ‘우리 그만 만나요’하고 이별 통보하며 눈물을 지었었다.
봄비에 젖은, 몸통이 굵은 플라타너스가 창문에 스치는가 싶더니 시간이 어느새 버스 안으로 되돌아왔다. 아른거렸던 영상이 있던 차창에 성균관대학 앞의 회전교차로가 나왔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른 버스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언덕길을 오르며 ‘한성대 앞’이라고 안내한다. 차를 탄 지 거의 50분이 지났다는 뜻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는 묽은 서리가 들판에 살포시 내리면 나는 달뜬 가슴으로 도봉산에 간다. 그곳에는 며칠 동안 달콤한 향기를 내뿜은 나무가 있다. 계수나무 향은 낙엽에서 난다. 잎에 있던 엿당이 분해되어 기화하면서 나는 냄새다. 여름에 잎을 씹으면 쓴맛이 나니 달콤하면서도 쓰디쓴 사랑의 속성이 떠오르는 나무다.' 나는 비로소 무릎위의 책에서, 창문에서 눈을 떼어냈다. 가방 위에 펼쳐진 책에서 피어오른 계수나무 향기가 버스를 넘어 가느다란 봄비가 내리는 창밖에도 가득한 듯 느껴졌다.
봄날 계수나무에게 묻기를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는 꽃과 향기가 한창이라
봄빛이 가는 곳마다 가득한데
그대는 어이해 홀로 꽃이 없는가
계수나무가 대답하기를
봄꽃이 얼마나 오래 가리오
바람과 서리에 잎이 떨어진 때
나 홀로 빼어남을 그대는 알긴 하는가
춘계문답-왕유
갈아탄 2번 마을버스가 성북동 골목길을 힘겹게 오르다가 멈춰 선다.
“길상사”
나는 일주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번 하고 절집 주차장과 맞붙은 반찬조리장으로 간다. 그곳에는 자기 생명의 한 부분을 기꺼이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서 계수나무보다 더 향기로운 나눔의 향기가 난다.
2023.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