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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말을 걸어 온 날

by 구자훈

“풍경은 말을 걸어온다. 풍경이 말을 걸어온다는 것은 풍경에 표정이 있다는 것이다”


풍경1

주말농장에 당첨이 되었다. 서초구와 성남시의 경계선에 걸쳐 있는 곳, 어지럽게 산재해 있는 농장과 합법/불법에 교묘히 걸치고 앉은 전원주택들이 있는 곳, 큰 도로에서 갈라진 편도 1차선의 비포장 길을 10여분 지나서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은 서초구 도시농원, 주차장 바로 앞에 위치한 7번 구역, 시청 출신임을 강조하여 얻은 명당.

쇠스랑으로 땅을 파자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이 마른 흙이 먼지와 함께 일어난다.(2023.4.4.) 그곳에 자신 있게 씨를 뿌린다. 이틀 전에 심어 놓은 상추 10포기, 쑥갓 6포기의 옆에 들깨 씨 한 봉지, 쑥갓 한 봉지를 뿌렸다. 그리고 주말농장에 오는 사람들이 가장 잘 보일 앞자리에 구절초 , 메리골드, 샐비아 각 한 봉지를 뿌렸다. 코에서 습한 바람이 느껴졌다. 예쁜 일기예보 리포트는 들뜬 목소리로 내일부터 비가 올 것이라 한다. 봄비지만 같은 느낌이 아니다. 올봄 내내 오지 않아 애타게 기다리던 단비이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아들이 베란다 창문을 닫으며 “비올라나 바람이 많이 부네” 중얼거린다. 그는 득의 만만하여 씩 웃었다.

이천 산수유 마을 도립리


풍경2

시골집의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2023.4.5.) 마당에는 물을 먹은 잔디가 춤추고, 축제를 막 끝내고 지친 산수유는 조용히 수분이 끝난 꽃을 비에 씻고 있다. 산수유의 뒤에 걸려있는 산에는 오동나무 같은 산벚꽃이 촉촉하니 피어있고 툭툭 불거지는 큰 은행나무의 잎이 싱그럽다. 처마 안쪽 작은 테이블에는 빗방울과 더불어 사람들이 있었다. 핑크빛의 막걸리도 있었다. 그들은 오는 봄비를 온몸으로 맞이하는 중이었다. 손이 두툼해서 언제나 따뜻할 것만 같은, 미소가 아름다운 집 주인이 미리 반죽해 놓은 밀가루를 손으로 밀어 칼국수를 끓이고 있었다. 맛보지 않아도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코를 찔찔 흘리는 꼬맹이 시절, 젊은 엄니가 모깃불을 피워 놓고 끓이던 그 국수, 막내는 밀가루 꼬투리를 얻어 불에 구워 먹었지. 딱 그 맛이어서 배부른 줄도 모르고, 미안한 줄도 모르고 세 그릇을 비워냈다. 핑크빛 막걸리 잔 속에 어린 내가 비쳤고, 젊은 내 어머니가 있었고 지금 함께하는 숲친들이 산수유와 함께 비에 젖고 있었다.

굴참나무

풍경3

마을 뒤에 숲이 있다.(2023.4.5.) 그는 그저 그런 마을의 뒷산이라 생각했다. 막걸리를 몇 잔해서 차를 운전하여 돌아갈 걱정이었던 그는 술도 깰 겸 별생각 없이 숲으로 갔다. 그에게 친숙한 참나무들이 비에 젖어 있었고 분홍 꽃을 피운 개복숭아가 간혹 눈길을 끌었다. 숲속에는 작지만 제법 모양을 갖춘 폭포가 산벗나무의 어깨를 짚고 그를 반겼다. 그와 함께 가는 이들은 참나무 6형제에 대해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며 숲속을 걷는데 그 속도는 거북이와 경주해도 뒤질 정도였다. 시간이 그들 머리 위로 내렸다. 숲속으로 들어갈수록 키 큰 소나무, 굴참나무가 의젓하다. 옆으로 누운 소나무를 받치고 있는 물푸레나무의 모습이 보이자 그들 중 제일 형님이 한 말씀 하신다. “저들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보여. 체구 작지만, 아래에서 밭치고 있는 저 물푸레나무는 부모이고, 덩치가 크지만, 위에 있는 소나무가 자식이야. 그저 자식들을 위해 죽도록 힘을 다하는 게 부모지”. 듬직한 목소리를 따라 큰 울림이 함께 왔다. 그 길로 좀 더 가니 오래 살아서 커다란 오동나무가 언덕에 줄지어 서 있는데 그들을 칡넝쿨이 뒤덮고 있다. 잎사귀가 없는 봄인데도 하물며 답답한데 칡의 잎이 무성한 6~8월에는 오죽할까? 다음에 다시 이 숲에 오면 낫을 들고 와서 오동나무가 오동나무다운 모습을 보이도록 미안하지만, 칡넝쿨을 잘라주리라.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절집에 다다랐다. 거기에는 500년 된 은행나무가 하늘과 땅을 오가는 전령처럼 늠름하게 서 있다. 두 마리의 흰 진돗개가 낯설다고 컹컹 짓는데 그는 그들이 하나도 낯설지 않았다.


풍경 4

우리가 들어온 숲이다.(2023.4.5.) 불과 50여 분을 들어왔을 뿐인데 인공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오직 산과 나무와 하늘만 보인다. 강원도 오대산 깊숙이 들어온 것 같다. 그 숲에 어둠이 내린다. 몇몇 산새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짝을 부르는 듯 지저귀고 있다. 새의 소리만으로 그들의 생김을 알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만 있다면 “나 괜찮아. 너는?”하고 말해 줄 텐데 하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는 사이에 소리 없이 숲의 어둠이 깊어 간다. 원시의 어둠. 다만 깜깜할 뿐인 어둠. 생명의 근원 같은 어둠. 소란스럽던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는 어둠. 그 어둠 속에서도 마음 편히 걸어갈 수 있는 사람, 도반

도립리 밤하늘.jpg


이 모든 것이 봄비가 만들어 놓은 풍경이었다. 풍경이 말을 걸어온 날이었다. 그날 풍경의 표정은 다양하였다. 그는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충만하였다.


*첫 문장은 바림(우종영)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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