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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이들

살다가 떠나는 이들을 뒤에 남아서 바라보아야 하는 이들에게

by 구자훈

아침 일찍 인천공항에 왔다. 공항의 공기는 언제나 약간의 흥분을 그러안고 있다. 또 그것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삶에서, ‘떠남’이 ‘남는 것’보다 좋기 때문인가? 오늘 아내의 출국일이다. 보통의 외국 여행과는 결이 달라도 너무나 달라서 출국하는 오늘도 나의 초조함은 누그러지지 않는다. 스페인 순례자의 길 800여 킬로미터를 혈혈단신으로 걸으러 가는 길이다. 배낭 8킬로그램 짜리 하나가 짐의 전부이다. 먼저 경험한 자들의 책에서 그 길 위에서는 이쑤시개조차도 버거워진다고 하여 극도로 제한된 물품이 배낭에 담겼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아내가 이러저러한 일로 잠깐 집을 비울 때에는 솔직히 홀가분함과 자유로움을 즐겼다. 그리고 초조함은 길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는 이의 몫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초조함이 온전히 나의 몫이다.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감정은 어디로 사라지고 없다. 진심으로 마음을 담아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잘 다녀오시라” 안아줬다.



연락이 없다. 며칠째다. 슬쩍 뒤돌아보는 정도의 틈에도 무슨 큰일이 일어날 것처럼 잠시도 보이지 않는 연결의 끈을 놓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아닌가. 대신 연락해 볼 일행도 없다. 일정을 뒤져 여정을 추리하고 묶을 만한 알베르게에 메일을 보낸다. SNS에 “이러이러한 이를 보면 여기로 연락바랍니다” 광고도 하고, 비행기를 예약하여 스페인으로 가 길을 반대로 걸어볼까도 생각한다.


“목적이 선하면 과정도 선하다.” 자주 인용하는 표현이다. 그 길에 나선 사람들은 자기 내면에 있는 뭔가를 찾기 위해 극한의 인내를 감수하는 이들이다. 그 길 위를 걷고 있는 누군가가 어려운 상황에 빠지면 서로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것이라는 믿음은 있으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초조함은 억누를 수가 없다. “아빠가 너무 걱정하는 거 아냐?” 아들이 한마디 한다. “그래도 걱정이 된다. 너는 걱정도 안 되냐?” 아빠가 성질을 낸다. 달랑 가방 하나가 전부이고 오로지 혼자 모든 상황을 감당해야 하는 아내가 겪는 당혹스러움이 어찌 간단하겠냐만, 그래도 남아 있는 나의 고통은 생각보다 깊었다.




무소식은 감옥



훌쩍 바람같이 떠난 이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너는 바람 되어 다니므로

무엇도 궁금하지 않을 거다


졸지 간에 낙엽처럼 남겨진 이는

무소식이 감옥이다

나무 되어 기다림으로 만든 채에

답답한 어둠만 걸린다


너는 남고 나도 남고

내가 가고 너는 남고

니가 가고 내가 남고

너도 가고 나도 가고


햇볕과 바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다행


떠난 이에게도 아픔이 이슬처럼 내리거라

나는 네게 이르는 돌 하나 들어내고

소복하니 내 슬픔으로 채우리라



‘너도 나처럼 아프거라.’ 사소한 앙탈을 부린다. 나는 이 감정이 일면 당황스러워서 가만히 마음속의 거울을 바라본다. 왜 이렇게 평소와 다른 감정에 정신이 혼미할까?


시간이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 있는 시간이 내게 변화를 강요하고 있었다.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고, 아웅다웅 싸우며 사는 사이에 가는 먼지처럼 내려앉은 시간의 조화였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물을 거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이냐고. 나는 말한다. “정든 아내”

이 단어는 평소에 사용하면 진부하기 그지없는 늙은 태가 나겠지만, 자연스럽게 오랜 세월을 함께한 누군가가 떠난 뒤에, ‘남겨진 시간’을 겪어 본 이들은 이해할 것이다. 이 단어가 주는 은근한 안식을···.

그녀가 돌아와 다시 이전처럼 늘 붙어 있는 상황이 되면, 지금 이런 감정이 그 이전으로 회귀할까?



길가메시가 집을 떠난다. 악당 엔키두를 친구로 만들어 가는 곳마다 또 다른 악당을 물리치며 영웅의 발걸음답게 밖으로 향하는 길을 나선다. 한편,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 길에 늘어선 악당들은 길가매시가 만나는 악당 못지않다. 그래도 난관을 물리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 선다. 길을 나서는 것은 두 영웅의 공통 사항인데 집을 기점으로 한 사람은 멀어지고, 한 명은 가까워진다. 누구는 떠나고, 또 누구는 돌아오지만. 누구도 ‘남겨진 이’는 아니다. 그래서 서양 영웅 이야기는 슬프지 않다.

심봉사가 울었고, 홍련이가 아팠고, 팟쥐가 슬펐다. ‘남겨진 이’들의 눈물이다.



내가 드디어 ‘남겨진 이’의 아픔을 이해할 정도가 되었나 보다. “그녀가 돌아와 다시 이전처럼 늘 붙어 있는 상황이 되면, 지금의 이 감정이 그 이전으로 회기할까?” 조금 전에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에 스스로에게 답해야 할 것 같다.


내게도, 그녀에게도 우리가 함께한, 먼지처럼 쌓인 시간의 한 마디에 이 순간이 또 다른 색으로 채워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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