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공원에서 만난 잊지 못할 한때
2023년 2월
숲해설사 과정 중 야외수업을 위해 월드컵 공원을 갔다. 지도와 나침반을 기반으로 공원 내에 미리 설치된 장소를 차례로 찾아내어 미션을 완성하는 에코티어링이라는 놀이를 배우고 점심을 먹은 후 동기 몇 명과 노을공원에 올라갔다. 생활 쓰레기로 만들어진 두 개의 언덕 중 서쪽에 있는 것이다. 행주대교가 내려다보이는 서쪽 끝에는 특이한 나무 한 그루가 지난해의 열매를 달고 있었다. 이미 이 분야에 전문가적인 지식을 가진 동기가 ‘모감주나무’라 알려주었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다. 나무 아래에 허리를 숙인 동기는 까맣고 작은 검은콩 같은 열매를 주워서 ‘이것이 이 나무의 씨앗인데 염주 만들기도 하여 염주나무라고도 한다’고 설명한다. 열매를 주워와서 드릴로 구멍을 뚫은 후 고무줄에 꿰었다. 나는 국립박물관에서 사 온 반가사유상의 목에 이 염주를 걸어 드렸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면서 이 나무의 아름다운 노란 꽃을 보았다. 전체적으로 꽃잎이 노란데 안쪽이 빨개서 연지를 바른 듯한 네 개의 꽃잎과 붉은 머리의 수술이 너무나 이뻐서 순간 반해버렸다. 이번 여름에 꼭 실물을 제대로 보리라.
2023년 6월
진행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핸드폰을 들고 유튜브에서 노래를 찾는다. 차 오디오의 기능모드를 블루투스로 바꾸자 짧은 전주에 이어 저음과 고음이 고루 안정되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집중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여가수의 매력적인 음성에 실려 노래가 나온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이다. 너무나 좋아서 색소폰을 배우면서 제 감정에 빠져 연주하곤 했던 노래이다. 그것을 손승연이 부르고 있다. 시작부터 귀를 사로잡는다.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적당하니 한가한 도로에서 듣는 음악에 마음을 적시는 사이 군포도서관 주차장에 닿았다. 마음이 급해진다. 성불사를 품에 안은 수리산에는 신갈나무가 넓은 잎을 바람에 날리며 중부지방 산에서 자라는 나무 중 우세종임을 보여주고 있다. 시멘트로 포장된 오르막길을 10분여 남짓 올라가니 오른쪽에 절집의 지붕이 보인다. 성불사 입구이다. 참지 못하고 조급하게 주변을 휫 둘러본다. ‘수리산에 가면 모감주나무가 있어요’라는 동기의 말을 믿고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 무작정 길을 나선 것이다. 두 아름 정도의 커다란 메타세콰이아 한 그루가 절로 통하는 입구에 서 있고 그 뒤에 노란 모자를 쓴 듯한 나무가 보인다. 관심이 없는 이들은 ‘모감주나무’의 존재를 지나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머리를 온통 황금색으로 물들인 노란 꽃은 주변 여건에 개의치 않고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노란 꽃으로 온통 뒤덮인 나무가 잘 보이는 곳을 골라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에 앉았다. 꽃잎이 바람에 실려 오더니 계단을 지나 대웅전을 넘어 뒷산으로 올라갔다. 한참을 앉았던 돌계단이 어느새 산그림자에 덮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주말, 골프를 가는 길이다. 인천공항고속도로를 달리는데 멀리에서도 단숨에 내 눈길을 사로잡는 나무가 보인다. 가슴이 뛰었다. 노란 꽃을 가득 머리에 이고 있는 나무는 ‘모감주나무’가 틀림없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는 한눈에 보아도 잘 자라서 꽃을 가득 피우고 있다. 골프 중에도 갓길에 차를 세우고라도 가까이 가서 사진 찍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모감주나무와 노란 꽃에 대한 갈증이 컸던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난 겨울에 노을공원에서 만났던 ‘모감주나무’가 생각났다. 공원 정상의 서쪽 끝에 있던 그 나무는 지금쯤 노란 꽃을 피우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차는 자연스럽게 가양대교를 넘어서 노을공원으로 향한다. 그렇게 계획도 없이 도착한 노을공원에서 나는 공원의 서쪽 끝 정상으로 갈 생각을 잊어 버렸다. ‘모감주나무’를 향한 나의 갈증을 해소하기에 넘치는 ‘모감주나무’가 공원 둘레길에 가득하여서 하늘이 황금빛이었고 떨어진 꽃으로 길 또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공원 둘레길에는 연보라색의 싸리나무꽃도 한창이다.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벌의 날갯짓이 분주하여 바람이 일어난다. 인적이 드문 ‘모감주나무’ 아래에 빈 의자가 있다. 가만히 앉아서 숨을 크게 쉰다. 벌들이 일으킨 바람이 꽃 사이를 서성인다. 눈을 감았다.
모감주나무 아래서
노을공원 둘레길이 환해졌습니다.
모감주나무가 하늘, 땅에 금빛 불 밝혔죠.
나무 밑에 빈 의자 하나...
길손은 쉬어가기로 합니다.
끝이 붉은 수술 비녀 여덟 개 꽂고
네 갈래 노란 옷깃에 연분홍 입술
바람결에 금 비가 내립니다.
꽃이 하늘과 땅에 지천입니다.
꽃잎 하나 의자에 내려왔습니다.
길손이 앉은 옆자리예요.
가슴이 두근댑니다.
먼 산 보는 척 슬쩍 곁눈질합니다.
저도 무심한 듯 얼굴 짓입니다.
바람이 지나가며 웃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다 보이나 봅니다.
그러니 모감주나무 아래에서는
부디, 서로의 마음을 숨기지 마셔요.
오늘 노을공원에서의 이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주머니 같은 열매가 달리고 그 속에 있을 2~3개의 까만 씨앗도 영글어 가겠지. 다시 노래를 튼다.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 갈 수 없다는걸 우린 깨달아야 해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실패와 고난을 비켜 갈 수 없을 때 사랑이 답이라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다고 노래가 말한다. 나는 이 세상 무엇을 사랑하게 될까?
다시 올 6월이 기다려진다.
20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