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

- 이브의 섬 5화

by 금희

사내는 황망했다.
눈앞에서 어매가 아침상을 내오고, 아배가 “많이 먹어라” 한마디 던지며 문을 닫기까지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목울대를 타고 침이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스스로에게 조차 부끄러웠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여인.
고개를 떨군 채 가만히 앉아 있는 작은 얼굴.
분명, 딸이라고 했었다.

사내는 수저도 들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옷도 입은 참 그대로였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책임질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이, 텅 빈 뱃속은 제 멋대로 꾸르륵거리며 안달을 부렸다.
사내는 속으로 ‘에라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일단 밥부터 먹고 보자는 심산이 들었다.

그가 크게 밥을 삼키자,
지영도 천천히 수저를 들었다.
밥알을 씹으며, 사내의 눈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훔쳐보았다.


배는 예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날씨가 관건이었다.
불안정한 대기, 잔뜩 심술이 난 바다.
마치 그의 앞길을 가로막으려는 마음이 굳게 선 듯했다.

그 사이, 그는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떠도는 이야기들을 주워 들었다.


“그 집 딸이 좀 이상하지 않나?”
“넋이 나갔단 소리도 있고, 무병이라나 뭐라나…”

사내는 오늘 아침의 그녀를 떠올렸다.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던, 작고 가느다란 어깨.
수저를 들지 못하던 떨리는 하얀 손.

그런 소문을 듣고 나니,
오히려 지영이 더 가엾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있는 방으로, 어쩌지 못하고 떠밀려 들어왔던 걸까.
생각할수록 씁쓸했다.

한편, 어매는 먼지 나는 마당을 서성이며 속을 끓였다.
사내가 돌아올지 어찌 알겠는가.
그대로 줄행랑을 친다 해도, 이 창피한 일을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울화가 치밀었다.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배는 지영의 손을 꼭 붙잡고 청승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영아, 아배는 니 혼자 두고 죽지도 못한다. 니를 돌봐줄 사내가 있어야 하는 거라.
그러니 니 맘 단디 먹어라. 알겄제?”

지영은 그때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라고 묻지도 않았고, ‘싫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 무언의 침묵이, 오히려 어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아직은 이른 저녁.
해가 떨어지기까진 아직 한참이 남았지만,
어매는 부엌을 분주히 오가며 찬을 차리고 지영의 방에 제일 좋은 이부자리를 깔았다.
몇 번이나 지영의 옷매무새를 고쳐주고, 긴 머리칼을 손질했다.
마치 새색시를 단장시키듯.

하지만 딸의 박복함에 연신 코끝이 찡해지자 애꿎은 고무신만 마당에 털었다.

아배는,
이 모든 판을 자신이 벌여놓았음에도 확신할 수 없는 착잡한 마음으로, 사내가 사릿문을 밀고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자꾸만 마을 어귀로 시선을 보냈다.

이윽고, 그가 나타났다.
아배는 반가움에 성급히 소리쳤다.

“거, 뭐 하노? 어여 저녁상 차리라.
살찐 놈으로 닭도 한 마리 잡고!”

사내는 쭈삣 거리며,
조금은 머쓱한 표정으로 손에 든 봉지를 내밀었다.

“이거… 육고기라 예.”
“허허, 이런 걸 또…
이건 내일 아침 찬으로 하면 되겄네. 잘 가져왔네, 잘 헜어.”

그날 저녁,
두 사람은 다시 술을 마셨다. 부끄러운 해가, 빨리 자리를 피해주기를 기다리며.


어제와는 느낌이 달랐다.
오늘은 마시면 마실수록,
술이 도리어 정신을 또렷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사내가 그런 생각을 할 즈음,
지영의 아배는 먼저 술에 곯아떨어졌다.

그를 본채로 옮긴 뒤,
사내는 한참을 마당에 서서 지영의 방을 쳐다보았다.

여름의 한가운데.
뜨겁지 않다면, 그건 여름이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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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잊혀진 작은 이야기들을 글로 옮기고 있습니다. 소리 없던 시간들을 글로 마주하는 여정을 시작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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