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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

- 선악과 14화

by 금희

“도대체 무슨 일인지 말 좀 해봐요.”
지니의 목소리는 떨렸다. 심장이 타들듯 뜨거운 눈물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울음이 새어 나오기 전에 눈물이 먼저 볼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생전 처음 보는 남편의 모습을 마주하고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쓰러진 태석의 모습도 낯설었지만, 현관문에 붙은 붉은 압류 딱지는 그보다 더 깊은 절망으로 그녀를 밀어 넣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인 거야…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지니는 숨을 고르며 태석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세상과 단절된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태석을 처음 만난 건 대학 시절이었다.
햇살 가득한 캠퍼스에서 찬송가를 부르던 그녀의 모습에, 그는 한눈에 빠져들었다.
“목소리가 참 좋네요.”
“고마워요.”
그날의 대화는 짧았지만, 그들의 시작이었다.

그때의 그는 믿음이 깊지 않았지만, 그녀를 따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어느새 신앙과 사랑이 그의 삶을 채웠다.
그 시절엔 모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믿음 위에 쌓은 삶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균열은 조용히, 그러나 깊게 파고들었다.
지금 태석의 가정에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술 냄새가 가득한 방 안에서, 지니는 무너져 내린 남편을 오래 바라보다 결심한 듯 그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손끝이 떨렸지만, 마음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가 남긴 흔적이라도 찿아야 해.’

그녀는 천천히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낡은 일기장이 있었다.
지니는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2018. 08. 13

조금만 참았으면 면허를 갱신할 수 있었다.
그 며칠을 왜 버티지 못했을까.
왜 또 술에 취한 채 운전대를 잡았을까.

와이프와 아이들을 볼 면목이 없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무너진 인간이 되었을까.

그리고… 현수는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무면허였다는 걸.
어쩌면 술에 취해 내가 뱉었을 수도 있다. 도대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진 현수의 대출 보증.
그것이 내 죄악을 덮은 대가의 시작이었다.

두렵다.
모든 것이…
신이 내게 돌아가 참회할 시간을 줄까?
아니면 이미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지니는 일기장을 꼭 쥔 채,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뒤에서 미세한 소리가 났다.
천천히 돌아본 그녀의 눈앞에, 비틀거리며 태석이 서 있었다.

“이게 다… 무슨 말이에요?”
지니는 목소리를 간신히 눌렀다.

태석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시선을 피했다.
말라붙은 입술이 떨렸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일기장을 덮었다.

“그건… 그냥 지나간 일이야 .”
“지나갔다고요?” 지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게 다 ? 당신이 한 모든 거짓말이?”

태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그땐… 어떻게든 숨기고 싶었어. 너무 무서웠거든.”
“그래서 술로 버텼어요? 그게 믿음이에요?”
지니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태석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 손은 더 이상 그녀가 알던 강한 믿음의 손이 아니었다.
술과 죄책감이 남긴, 연약하고 무력한 손이었다.

“여보…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처럼 사라졌다.

지니는 천천히 문을 닫았다.
비뚤비뚤 흔들리는 글자들 사이로, 그녀의 마음도 함께 뒤틀렸다.
잠시 멈춘 시간 속에서 정적이 흘렀고, 숨소리조차 삼켜졌다.

‘이제 끝이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삶은 이미 기울고 있었다.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무엇을 놓아야 할지 이제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단지 한 가지를 깨달았다.
더는 이 사람과 함께 가라앉을 수 없다는 것을.
태석은 이혼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어쩌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더 이상 멈출 수 없는 불행의 길 위에서, 그는 그녀와 아이만큼은 도망치듯 멀어지길 바랐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그들의 삶이 자신에게서 벗어나기를 기도했다.
하루하루 삶은 더욱 곪아갔지만, 지금의 태석에게 가족의 관심조차도 견디기 힘든 사치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현수를 보낸 신을 원망했다.
선악과를 베어 물게 했던 그날처럼, 모든 불행의 시작을 조용히 내려다보던 신을.

하지만 결국 그는 깨달았다.
유혹은 언제나 남이 아닌, 자기 안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잃어버린 삶은 다시 되찾을 수 없었다.
술의 쓴맛이 목을 적시고 뇌를 잠식할 때면 그제야 잠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달, 아니 어쩌면 몇 년.

좌판을 시작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가 무너지자, 나머지 것들은 애초에 그의 것이 아니었던 듯 사라졌다.
집도, 직장도.
그도 왜 좌판을 열기로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아마 그날도 취해 있었을 것이다.

발악하듯, 그는 마지막 숨을 끊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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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잊혀진 작은 이야기들을 글로 옮기고 있습니다. 소리 없던 시간들을 글로 마주하는 여정을 시작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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