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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신 독

- 선악과 13화

by 금희

현수는 검은 외제차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조수석에는 화려한 눈화장을 한 여자가 씹던 껌을 창밖으로 뱉었다.
신호가 바뀌자 현수는 굉음을 내며 차를 몰았다.
그의 웃음이 밤공기를 갈랐다.
협박하던 태석이 파산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날에도, 그는 웃고 있었다.
태석이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다치게 했을 때,
그는 그것을 덮어주는 대가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지를 정확히 계산했고, 실행했다.

나는 그를 변명할 생각이 없다.
아니, 그를 이해하려 애쓰는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런 그에게 숨겨진 상처나 선한 본성이 있다는 말은, 아무리 그럴싸해도 믿지 않는다.
이해도, 동정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말 따윈 하고 싶지 않다.
그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다.
필요하다면 타인의 이름도, 타인의 신뢰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현수는 선택했다. 짓밟는 쪽을

사람들은 말한다.
누구든 상처가 있고, 환경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고.
하지만, 환경이 모든 걸 결정짓진 않는다.

그럼에도 누군가 그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어 한다면...
아주 잠시, 그의 과거로 돌아가 보자.
단, 나는 거기에 어떤 미화도 덧붙이지 않을 것이다.
그때 현수는 열두살이었다.
사과밭 구석, 햇살이 반쯤 기운 자리에서 그는 쪼그려 앉아 사과를 고르고 있었다.
묵묵히, 크기별로, 벌레 먹은 것과 멀쩡한 것들을 나누는 손놀림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 옆에서 바삐 움직였다.
상품성이 좋은 사과를 흠집 없이 골라내어 박스에 담는 일을 오늘 안으로 마쳐야 했다.

“이거 팔아요?”
젊은 여자와 남자가 불쑥 다가왔다. 여자의 손엔 사과 봉지가 들려 있었다.
“아, 예. 만 원입니다요. 열 개요.”
아버지는 과하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이거, 맛은 있어요? 색은 별론데... 시식용은 없나?”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사과를 꺼내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하얗게 드러난 속살을 잘라내 손님에게 내밀며 말했다.
“농약도 별로 안 쳐서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습니다.”
남자는 무심하게 한 입 베어 물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먹을 만하네.”
그렇게 사과를 팔고, 아버지는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몇십 분쯤 지났을까.
검은색 고급차 한 대가 사과밭 입구에 멈춰 섰다.
막 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아버지와 현수는,
차에서 내린 인물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조금 전 사과를 사간 바로 그 남녀였다.
여자는 차 안에 앉은 채 껌을 씹으며 풍선을 만들었다가 터뜨리는 일을 반복했고,
남자는 손에 사과 봉지를 들고, 조용히 그러나 무례하게 다가왔다.
“아니, 농부 양반. 정직하게 장사해야지.”
다짜고짜 내뱉는 반말에, 아버지의 표정이 살짝 굳었지만 여전히 공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 모습을 현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과가 썩었잖아. 썩은 걸 팔면 돼?
배라도 아프면 어쩔 건데? 책임질 거야?”
순간 화가 난 어린 현수는 얼굴이 붉어졌다. 꽉 진 두 주먹이 분노로 움찔거렸다.
거짓말, 우리 사과는 안 썩었어! ”
현수의 성난 목소리가 절규하듯 울렸다.
“아니, 어린놈의 새끼가 어디서...”
아버지는 화가 난 남자 앞을 막아서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현수를 한 팔로 제지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애가 어려서...”
아버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남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여자가 차에서 내렸다.
“자기, 그냥 가자. 나 썩은 거 안 먹었어. 괜찮아.”
순간, 남자의 손이 여자의 뺨을 후려쳤다.
공기가 멈췄다.
여자는 휘청이며 뺨을 감쌌고, 남자가 다시 손을 높이 들자 아버지는 다급히 그의 팔을 붙들었다.
“사장님, 그러지 마시고... 뭘 어떻게 해드리면 될까요?”
그 말에 남자는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그날, 아버지는 만 원어치 사과를 팔고, 그 사내의 손에 십만원을 쥐여주었다.
현수는 그 모든 것을 지켜봤다.
뺨을 맞은 여자도, 고개 숙인 아버지도,두려운 얼굴.약한 얼굴.

현수는 그날, 그 무엇보다 그런 얼굴이 싫었다.
그래서 다짐했다.
약해지지 않겠다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약자의 얼굴은 가지지 않겠다고.
나는 지금도 그를 미워한다.
용서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가 내 삶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그가 어릴 적 어떤 상처를 가졌든, 어떤 세상을 보며 자랐든
그것이 그의 어른이 된 지금의 행동을 정당화하진 않는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나는 , 나 자신을 미워하지만, 그처럼 악해지지도 않았다.
나는 내 손으로 누군가를 절벽 아래로 밀어뜨리지 않았고, 누군가의 손을 붙잡아 주지도 않았다.
어쩌면 나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길을 택했는지 모른다.
그게 내가 그에게서 끝내 지키고 싶었던 것이었나? 어중간한 삶? 무색의 삶!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단언컨대 그처럼 되지 않을 것이다.
밤공기가 서늘하다.
노천 좌판에 등불 하나가 깜빡이고, 태석의 마음처럼 흔들렸다.
투명한 술을 목구멍 깊숙이 넘겼다. 불길은 천천히 내려가며 태석을 태웠다.

“내가 마시는 건 독인가? 독이 아니고서야 이리도 목구멍이 탈까...”

삶의 해독제를 찾아 현수는 비틀거리며 골목안길로 걸어갔다.
내가 뱉은 것은 무엇인가?
내가 , 삼키지 못한 것은 또 무엇일까?
현수는 사라졌고, 좌판은 어둠을 가장한 밤의 고요 속에 남았다.
마시다 남은 술이 달빛에 출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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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잊혀진 작은 이야기들을 글로 옮기고 있습니다. 소리 없던 시간들을 글로 마주하는 여정을 시작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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