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필연이 되려면.

-시간을 밟고 12화

by 금희

일요일, 오늘은 전과 달랐다.
밤늦게까지 유튜브와 한국 연속극을 보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던 날들.
무엇이 그날과 오늘 아침의 공기를 바꿔 놓았을까?

지훈은 좁은 소파 위에서 따끔거리는 눈을 깜빡이며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며칠 전, 자신에게 중고차를 부탁하던 수잔의 얼굴이 연속극 대사 속에 섞여 따라다니더니 , 어느새 머리맡까지 다가와 그의 마음을 어수선하게 했다.
이제는 대충 덮어둘 수도, 쉽게 떨쳐낼 수도 없는 감정이었다.

오전 7시.
어쩌면 지금 레스토랑에 가면, 그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지훈은 외투를 걸치고 현관을 나섰다.

레스토랑은 여느 주말처럼 북적였다.
혼자 온 이들도 여럿 있었지만, 지훈 눈엔 그저 느슨한 캐나다의 익숙한 풍경으로만 비쳤다.
자연스레 주방 쪽으로 눈이 갔다.

그는 메뉴를 건성으로 주문하고, 생각보다 빨리 나온 토스트를 집어 들었다.
망설이는 말들이 혀끝에서만 맴돌던 그때, ‘죠안’이라는 이름표를 단 웨이트리스가 먼저 아는 척을 해왔다.

“헤이, 당신. 그때 그 팁, 맞지? 수잔 보러 온 거야?”


지훈에겐 그렇게 들렸다.

약간의 호기심과 장난기.
그리고 그녀의 입을 통해 수잔이 병가로 쉬고 있다는 말을 들은 순간, 지훈은 아침을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른 채 집으로 돌아왔다.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걸까?

지훈은 영어 시험장에서 우연히 그녀를 마주쳤던 날을 떠올렸다.
사실,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처음 수잔을 본 건 레스토랑이었다.
동료와의 저녁 약속에 조금 일찍 도착했던 그는, 시끄러운 주방 쪽에서 말다툼이 벌어지는 걸 목격했다. 그 가운데, 몸집만큼 큰 남색 가죽 앞치마를 두른 동양 여자가 있었다.

한국인은 한국인을 알아봤다.

그녀는 묵묵히 접시에 남은 음식물을 분리하고 있었다. 조급한 웨이트리스가 짜증을 내며 접시를 마구 올려놓자, 누군가가 수잔의 편을 들며 제지했다.
디시워셔와 웨이트리스의 경계가 애매했던 그 상황.
잠시 후, 수잔이 다시 테이블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지훈은 알 수 없는 감정에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5달러의 팁을 웨이트리스에게 건넸다. 좀 전의 장면 때문인지 팁을 건네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건 당신 거고, 이건 디시워셔에게 전해주세요.”
20달러.

말없이 일하던 그녀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 외에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날 이후, 그는 레스토랑 주변을 자주 맴돌았다.

어느 날, 그녀는 커다란 쓰레기봉지를 들고 주차장 쪽으로 나왔다. 비틀거리며 그녀보다 키 큰 쓰레기통 앞에서 몇 번이고 점프했다. 무겁고 큰 검은 봉지는 쉽게 넘겨지지 않았다. 그녀의 볼과 코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공기조차 얼려버리는 이 계절은 , 무심하고 또 잔혹했다.


지훈은 그 순간, 뛰쳐나가서 쓰레기자루를 낚아채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는 단순한 연민 이상을 느끼고 있었다.
그냥, 이국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여자를 보고 동정했을 뿐이라 말해도 상관없었다.
지금의 감정이 사랑이라 말하기엔 이르다면, ‘동포애’라는 말로 남겨둬도 괜찮았다.

며칠 뒤, 영어 시험장에서 그녀를 다시 본 날.
이번엔 그가 찾아낸 게 아니라, 그녀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마치 필연처럼.

복도 한쪽에 서서 구술시험을 준비하는 그녀 앞을 지나쳤지만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지훈의 시선은 어느새 그녀만을 좇고 있었다.


시험을 마친 그녀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고, 지훈은 따라갔다. 같은 그레이하운드 버스, 같은 목적지.
지훈은 먼저 타서 그녀의 눈에 띄도록 맨 앞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그녀가 버스에 타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고, 그녀는 망설였다.

그는 자신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마치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녀는 말이 없었지만, 지훈은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하지만 도착 후, 그녀는 택시를 타고 떠났고 말없이 멀어졌다.

그리고 마트에서, 정말 우연히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필리핀 남자와 함께 있었다.
친구 같아 보였고, 내심 안심도 됐지만 여전히 그녀는 차가웠다.
그 거리 두기는, 마치 자신을 지키려는 본능처럼 느껴졌다. 지훈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아릿함에 잠시 시선을 붉혔다.

그런 그녀가 정비소로 찾아왔다.
중고차를 구하고 싶다며.
지훈에게 부탁을 하기 위해.
그것만으로도 기쁨이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을 떠올려준 것만으로도,
그녀가 내민 손에 그의 가슴은 벅찼다.

그런데,
그녀에게 여행을 같이 가자고 말해버린 건 너무 성급했던가...
지훈은 후회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자식...”

그녀는 그렇게 다시 사라졌고, 오늘, 그녀가 아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지금, 지훈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는 핸드폰 속 그녀의 이름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그날, 처음으로 한국 이름을 말했다.
수영.

그날, 그녀가 여행을 떠날 거라고 말했을 때,
굳이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훈에게 다시 연락했을까...


하얀 길 위에 그의 물음은 소리 없이 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