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한 장 그리고 이야기 하나
어느 날 갑자기 동네에 이런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길고양이 먹이를 주지 마세요. 고양이는 구할 수 있는 먹이의 양에 비례해 개체수가 늘어납니다. 또한 각종 전염병을 옮길 우려가 있으며 울음소리 등으로 공동생활에 불편을 초래하므로 자연 상태로 적정한 개체수 유지가 필요합니다.”
저는 강아지 3마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강아지와 인간의 목숨 중 딱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 인간의 목숨을 구할 것입니다. 지난 글 “개고기와 암호화폐”에서 개고기를 반대하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봤습니다. 그러나 식량이 모자란 인간 집단이 있다면 개고기를 먹는 것은 당연하겠죠. “길냥이”라고 부르는 주인 없는 거리의 고양이들이 인간의 삶을 위협한다면 당연히 조치를 취해야 할 겁니다.
이런 속담이 떠오릅니다. “3일 굶고 도둑질 안 하는 사람은 없다.” 배고픔은 엄청난 고통입니다. 아니, 생명이 있는 존재들에게 먹는 행위는 존재의 이유일 겁니다. 배고픔은 생명체들에게 견딜 수 없도록 세팅되어있습니다.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고 하는 현수막의 내용을 보면 “길고양이들을 굶겨 죽이자.”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길고양이 개체수 조절을 그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하는 겁니다.
길고양이들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에 동의합니다. 지금처럼 위생에 민감한 때에 그들이 야기하는 불결함에 대해 걱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불편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주위의 반려동물들을 견디는 것도 힘든데 길고양이들까지 견뎌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도 가혹할 겁니다.
길고양이 중성화 수술 사업은 개체수 조절에 그나마 수긍이 가는 대책입니다.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퍼트리는 것이 생명체의 존재 이유라면 잔인한 방법이 될 수도 있지만요. 중성화 수술은 비교적 고통도 적고, 직접적인 개체 수 조절이 가능한 방법이라 효율도 좋을 것입니다. 길고양이들이 손쉽게 먹이를 구할 수 없게 함으로써 개체수를 얼마나 조절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동네에 걸린 현수막의 숨은 뜻은 따로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대부분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들은 먹이를 주는 것 만으로 자신의 책임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길고양이들은 설거지도 못하고 먹은 자리를 청소하지도 못하죠.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로 착한 일을 했다는 뿌듯함이 느껴질 겁니다. 그러나 자신의 행위가 좋은 면과 나쁜 면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먹이를 주었다면 그 후 먹이 그릇도 회수하고 먹이로 인해 더러워진 주변도 청소해야 합니다. 동물을 위한다는 것은 그렇게 1차원적인 생각이 아니라 고민을 많이 해야 하는 행위입니다.
상상해봅시다. 먼 미래, 외계인들이 쳐들어와서 인간들을 지배하게 됩니다. 외계인들이 인간의 개체수를 조절하기 위해 굶겨 죽이는 방법을 택했다면 어떨까요? 며칠 동안, 몇 주 동안 굶는 고통을 당하느니 지금 바로 생을 마감하고 싶을 겁니다. 인간은 인간 이외의 종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 고통의 원인을 인간이 주었는데도 말이죠. 우리 동네 길고양이들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