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한 장 그리고 이야기 하나
(영화 "나이브스 아웃"과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저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극장에 가지 않습니다. 팬데믹이 일어나기 전부터 그랬으니 다른 이유가 있겠죠. 극장이 비 위생적이라는 사실은 예전부터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지금은 좌석 청소나 소독을 잘하고 있겠죠? 극장의 대형 스크린과 빠방 한 음향시설을 빼고는 영화감상에 유리한 것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요소요소에 영화감상을 방해하는 짜증 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죠. 대형 극장에 걸리는 영화가 다양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지만 결정적으로 극장 가격이 너무 높았습니다. 지금은 더 비싸졌죠. 그래서 저는 OTT서비스의 등장을 반겼고 지금도 적극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단점이 존재하고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넷플릭스 영화들 중 실망스러운 영화들이 더 많을 겁니다. OTT서비스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구조이니까요. 그러나 멀쩡한 영화를 가지고 와서 엉망으로 망쳐놓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영화 "나이브스 아웃 (Knives Out)"은 씨가 말라가고 있는 추리 영화 장르의 단비와도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작품성도 인정받는 수작입니다. 각종 영화 시상식 수상과 아카데미 노미네이트로 객관적 평가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추리 영화를 보면서 얼마 만에 맛보는 흥분이었던지... 그 짜릿함은 감동이었습니다. 그런 영화의 속편이 나온다니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각본의 힘을 입증받았던 영화였으니 속편의 수준도 어느 정도 보장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의 속편을 이렇게 망쳐 놓다니!
영화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 (Glass Onion: A Knives Out Mystery)"은 영화 중반부까지 재미있습니다. 기존의 클래식한 추리 영화들을 오마주 하는 것 같으면서도 새로운 구성이 신선했습니다. 마지막 결말이 너무도 기대되는 훌륭한 과정으로 보였습니다. 추리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영화 장르 중 마지막 결말이 너무도 중요한 것이 추리 영화입니다. 추리 영화의 미덕이란 마지막에 관객이 예상하지 못한 무엇인가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그것은 놀라운 반전일 경우가 많죠. 꼭 반전이 아니라도 전체 영화 이야기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충격이 있어야 합니다. 나이브스 아웃 1편은 꽤 준수하게 그 일을 해냈었죠.
영화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저는 당황스럽다가 결국 화가 났습니다. 이 영화는 추리 영화가 아닙니다. 추리 영화의 명맥을 이을 최고의 유망주를 이렇게 죽이다니요!
넷플릭스는 셜록 홈즈와 포와로의 뒤를 잇는 전도유망한 탐정 캐릭터를 사 와서 넷플릭스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로 키우고 싶어 했을 겁니다. 저도 그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심심풀이용 시간 죽이기, 그렇고 그런 넷플릭스스러운 영화로 전락했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들이 작품성에 찬사를 받으며 많은 거장들이 넷플릭스와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넷플릭스다운 영화"들이 쏟아지고 있죠. 넷플릭스에서 볼만한 영화를 찾다가 실패한 경험이 더 많다는 것이 그 증거일 겁니다.
확실히 OTT용 영화의 문법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은 실망스러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괜찮은 소수의 작품들이 소진되면 OTT의 콘텐츠는 너무도 궁핍하게 보입니다. 한 작품이 갑자기 전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는 현상에는 그만큼 좋은 작품이 드물다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몇 안 되는 좋은 작품들이 흥행을 쓸어가는 것이지요. OTT용 콘텐츠의 잘못된 문법을 비교적 잘 비켜간 제작사가 지금까지는 대한민국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은 정말 기대가 컸던 영화였습니다. 다시 시리즈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나온다면 적어도 추리 영화가 무엇인지 충분히 고민한 흔적이라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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