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한 장 그리고 이야기 하나
저는 2022년부터 매년 유서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유서 쓰기 2022년, 즐거운 유서 쓰기-2023년) 첫 유서에 한해, 한해 내용을 더하는 형식입니다. 유서 쓰기에 제법 진지합니다. 브런치스토리에 남긴 유서가 저의 죽음 이후 정말 효력을 발휘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작성된 유서는 법적 효력을 가지기 힘들 것 같더군요. 법에서 인정하는 유서 형식이 매우 까다로운 것 같습니다.
2024년, 제가 유서에서 고민하고 있는 주제는 "치매"입니다. 개인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의외로 적은 편입니다. 당장 죽음에 직면하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이렇게 유서를 담담히, 약간의 재미도 느끼면서 작성한다는 것 자체가 저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조금은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한 태도는 유서 내용에서 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치매"는 차원이 다른 고뇌를 하게 됩니다.
치매는 죽음이 아닙니다. 차라리 죽음이면 간단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네요. 치매는 기억의 사망선고입니다. 이성적으로는 치매가 걸린 나를 죽음과 동일시하고 싶습니다. 기억이 없는 나는 더 이상 "나"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마음에서는 그런 나 자신이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치매 환자들도 가끔씩 제정신이 돌아온다는데 그럴 때 자신의 처지를 보고 얼마나 슬플까요?
나이를 먹어갈수록 소망이 없어집니다. 현재가 고마울 뿐이죠.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치매에 걸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번 유서의 버전은 0.1만 올립니다. 치매에 대한 내용이 업데이트의 핵심인데 치매에 대한 저의 생각이 아직 확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서 ver 2.1 - 2024년 작성)
내가 치매에 걸릴 경우 죄책 감 없이 적당한 요양원에 보내라.
나의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갔다면 치매 관련 임상실험에 지원하기를 희망한다.
(2024년 현재 기준, 치매에 대한 명확한 나의 의견이 확립되지 않았다. 위의 내용은 변경될 수 있다.)
(유서 ver 2.0 - 2023년 작성)
"과정은 실력이고 결과는 운이다." 2023년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이 한 문장이다. 당신들의 영원한 숙제 한 가지를 해결해 주겠다.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할까? 잘하는 것을 해야 할까? 결과가 운이라는 전제에 동의한다면, 결과 즉 성공은 내가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실력의 영역인 과정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결과에 다다르지 못하고 과정만 헤매다가 죽을 운명이다. 좋아하는 일이라는 것은 반드시 과정이 즐겁기 마련이다. 좋아하지 않은데 잘하는 일은 결과만 따지고 과정은 관심 밖이다. 과정이 즐거운 일은 결과가 나쁘더라도 남는 게 있다.
(유서 ver 1.0 - 2022년 작성)
유산
나의 모든 유산은 아내가 살아있을 경우 모두 아내에게 귀속된다. 만약 아내가 세상에 없다면 사회에 환원한다.
장례절차
나는 사후 세계를 안 믿으니 장례식을 할 필요가 없다. 돈을 아껴라. 장례비용 너무 비싸다. 단, 살아있는 사람들이 나의 장례식을 치러야지 마음이 편하다면 마음대로 하라. 난 어차피 죽었다. 혹시라도 수의나 관, 장례용품 등의 가격대를 정할 때 망설여진다면 제일 싼 것으로 하라. 걱정 마라 귀신이 되어서 왜 싼 걸로 했냐며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의 바람은 장례식이 없는 것이다. 내 시신의 남은 부분이 의학적으로 유용하다면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 후 남은 시신은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가장 싼 방법으로 처리하길 바란다. 나는 사후 세계를 안 믿고 내 몸은 죽어서 아무것도 못 느낀다.
지적, 디지털 재산
내가 남긴 모든 지적, 디지털 유산도 법적으로 가능하다면 아내에게 모두 귀속된다. 만약 아내가 세상에 없거나, 지적 재산권을 행사할 주체가 불분명하게 된다면 모두 무료로 공유되고 활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출처를 밝힐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