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치하이커 Jan 24. 2022

사기업에서 공무원까지 나의 직장생활 분투기(2)

노가다의 추억

본격적인 직장 얘기를 하기 전에 사회생활 이전의 삶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예체능 관련 특기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고 각종 대회 등에 출전하며 전국대회에서 수상도 하면서 한껏 우쭐해있었다. 적어도 같은 시기를 보내는 또래에 비해 앞서 나간다는 기분이랄까. 재능 있는 사람이란 나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여기에 노력까지 더해진다면 세상 무엇도 두려울 게 없다 생각했다.


이후 대학교 진로도 같은 분야에 지원했다. 그때는 진로를 정하면서 별다른 고민이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한 가지에 열정을 바치는 게 당연하고 선택받은 고귀한 업이라 생각했다. 노력한 만큼 모든 것이 잘 풀리고 보상받을 거라 생각하며 미래를 그려나갔다.


그 순진한 생각은 반년만에 접게 됐다. 입학과 동시에 가세가 완전히 기울면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학기를 마치고 내게 남은 선택지는 휴학뿐이었다. 친구들이 강의를 들으러 가고 방학에 어학연수를 떠날 때 나는 학비를 벌기 위해,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어찌 됐든 휴학 중 선택했던 첫 번째 일은 동네에서 알던 형이 같이 일해보자고 얘기하며 시작됐던 원정 노가다였다.


도박장이나 기웃거리던 J는 몇 년간 나에게는 꽤 친근하게 잘해주던 인물이었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지만 도박자금이 떨어지면 올라가서 몇 개월 일하고 다시 내려와서 그동안 번 돈을 도박을 하며 탕진하는 삶을 반복하는 형이었다.


어느 날 수원에 가면 꽤 돈을 벌 수 있다는 설명과 집을 구할 필요도 아무 경력도 필요 없다며 함께 일해보자고 제안을 했다. 가보지 못한 곳이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 틈이지만 당시에는 꼭 돈을 벌어야 할 상황이었고 수원에 가면 J라도 곁에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가지 말아야 할 이유보다 가야 할 이유를 먼저 생각했다.


그렇게 내가 간 곳은 S전자의 수많은 협력업체 중 하나로 형제가 경영하는 소위 노가다 회사였다. 일용직은 열댓 명 정도에 수원과 용인에 사업장 두 곳을 관리했다. 인적 구성부터 살펴보면 대표인 사장은 제법 살집이 있고 까무잡잡한 얼굴이지만 작업복을 벗고 사복을 입으면 좋은 시계에 그랜저를 끌고 다니는 제법 자수성가한 티가 나는 사람이었다. 근데 인상과는 다르게 매사 부정적이고 직원들이 아프던 말던 야근과 철야를 주문하는 냉정한 인물이었다.


대표의 동생인 작업반장은 얼굴은 살이 없고 앙상하지만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그가 하는 일이란 인부들을 현장으로 나르고 현장에서는 주로 작업 지휘했는데 인상도 더러웠고 모든 일에 화를 냈다.  20  일인데도 트라우마가 남을 정도다. 그는 걷든 앉든 밥을 먹든 작업을 하든 항상 몸의 상위가 약간 앞을 향해있었다. 참을성 없고 성격이 급해서 그런 자세였나 보다. 연장만 던지지 않았을  현장에서는 직원들에게 폭언과 윽박지르기가 일쑤여서 출근한 첫날부터 회사를 나오는 6개월간 멘털이 박살 나는  같았다.


대부분의 숙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중독자들이었다. 게임에 미친 사람, 도박에 환장한 사람, 경마, 여자 등 유흥과 한탕에 모든 것을 내던지는 사람들이었다. 중독된 대상만 다를 뿐이지 삶의 태도는 엇비슷했다. 절제와 주제를 망각한 삶이어서 같이 있으면 기운이 빠지고 정신 안 차리면 저런 모습으로 늙어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니지에 미쳤던 나보다 두 살 어린 Y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여자 친구가 이화여대를 다닌다고 자랑했다. 자기는 그 누나를 너무 사랑해서 매주 용돈을 준다고 했다. 하루 12시간 넘게 노가다로 번 돈과 8시간 게임하면서 모은 아이템을 팔아 누나에게 갖다 바친다고 하며 언젠가 결혼할 수 있을 거라 말했다. 그 희망찬 눈빛에 나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곳을 다니는 동안 Y가 누나를 실제로 만나거나 사진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30대의 형들은 대부분 월급 받으면 몽땅 옷을 사거나 몸을 치장하는 일에 몰두했다. 꾸민 게 무색할 만큼 딱히 연락이 오는 사람이 없었고 한 껏 꾸미고 기껏 경마장과 PC방을 향했다. 한 번은 같이 자리를 하다 먼저 일어났는데 그 형들은 너무 게임에 몰두해서 다음날 출근도 하지 않고 PC방에 있었다. 덕분에 다음날 사장과 동생이 노발대발했고 저녁 12시까지 남은 인원들이 잔업을 해야 했다.


나보고 수원으로 가자고 한 J는 사람 좋은 형이 아니라 순악질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주도적으로 그곳에서 왕따를 시키고 무시를 하는 바람에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더 적응하기 힘이 들었다. 일부러 엿을 먹이려고 같이 가자고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몇 개월 돈을 벌더니 다시 내려가서 도박으로 돈을 벌어오겠다고 하며 그만뒀다.


사람들이 머무는 숙소는 아파트였다. 방이 5개 정도에 화장실이 3개 정도 되는 신축 아파트였다. 한 방에 3-4명씩 자야 해서 수면의 질이 높지는 않았다. 숙소에는 라면이 가득했고 사람들은 배가 고파서 야식을 달고 살았다.


협력업체에서 하는 일이란 반도체 공장을 짓는 일이었다. 크고 무거운 파티션 같은 것들을 계단을 통해 나르고, 방진복을 입고 마스크를 한 상태로 공장 내부에 들어가 작업장을 구획하는 역할을 했다.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게 아니라 생산되는 반도체를 보호하기 위한 복장이었다.


일은 일찍 시작해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새벽 5시쯤 일어나서 5시 30분쯤 승합차에 타고 일하기도 전에 함바집에서 든든하게 식사를 하고 일곱 시부터 4-5시간쯤 일했다. 얼마나 힘든지 점심도 거르고 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점심시간은 두 시간이지만 오고 가고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한 시간이 지나버렸다. 공장의 안과 밖은 꽤 거리가 멀기 때문에 딱히 휴식할 곳도 없었고 항상 옆에서 감시하는 대표와 동생 때문에 오후 내내  작업을 해야 했다.


처지는 비관적이었지만 하루 기본급 5만 원, 야근하면 7만 5천 원,  철야하면 12만 원이라 일을 빠질 수가 없었다. 20년 전이지만 월 200씩 벌었으니 당시에는 쉽게 만지기 어려운 큰돈이었다. 몸이 아프지만 쉬라고 해도 자원해서 일했고 모은 돈은 대부분 본가 집에 보냈다. 스무 살,  그렇게 6개월을 보냈다.


쉰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31일 중에 30일을 일했고 주말근무도 자원했다. 점차 몸은 망가졌고 그중에서도 허리 통증이 심해져 일상생활도 불편해졌다. 너무 몸이 아프고 사는 게 힘들어서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매일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 희망도 꿈도 소용이 없었다.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과 가족들 곁에 있고 싶다는 욕망만이 지옥을 견디는 힘이었다.


그러던 중 집에서 새로운 사업을 하는데 형편이 좋아질 거라고 했다. 고민 끝에 6개월간의 알바를 마치고 본가로 내려왔다.


이 경험을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내가 그런 곳을 가고 그런 인간들을 만난 건 나의 잘못은 아니지만 깊은 고민을 하지 않고 선택했기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 시절의 내가 돈보다 값진 경험을 추구하고, 선택에 대해 고민을 깊게 하고, 믿을만한 사람에게 조언을 구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나는 조급했고 미성숙한 인간이었고 응당 대가를 치른 셈이다.


또 한 가지는 젊었을 적 적 내가 한 것 같은 고생은 안 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의미를 부여하기 좋아하는 나는 노가다나 아르바이트 경험이 훌륭한 내적 자산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사회생활 속에서 터득한 인내심이 언젠가 필요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힘든 일을 하면서 깨달은 점은 본인 또한 성격이 안 좋아지고 인내심이 없어지고 그런 곳에서 만난 사람 들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번 돈이 밑천이 되어 집안에 보탬이 됐지만 두고두고 그때의 선택과 경험을 후회하고 있다. 글을 쓰면서 비로소 치유가 되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다.


학생은 말 그대로 공부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 취업을 하기 전까지 자신의 가치나 실력을 객관적으로 올리는 일에 매진을 해야 한다.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것은 효율적이지도 별로 기억에 남을만한 선택지도 아니다. 아주 고수익의 과외 알바가 아닌 이상 을, 또는 병의 위치에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고 불평등한 세상을 먼저 경험하는 것이다.


학생 때는 좋은 직장을 선택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전과 다르게 공공기관 일자리도 괜찮다. 주변에 좋은 사람을 두고,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만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한다면 성장이란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사기업에서 공무원까지 나의 직장생활 분투기(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