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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치하이커 Jan 25. 2022

사기업에서 공무원까지 나의 직장생활 분투기(3)

생각 말고 사고를 하자

인생의 어느 순간 꼬이거나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기가 어려운 법이다. 노가다 생활을 마치고 어렵게 복학했지만 아르바이트라는 이름의 경제활동도 계속됐다. 학비 외에도 생활비를 자체 조달해야 했기에 수업을 마치면 햄버거 제조, 식기류 청소, 택배 상하차, 콜센터 업무, 동영상 촬영 편집, 노래방 등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파트타임 일을 하게 됐다. 일주일 내내 수업과 아르바이트에 시달리며  전보다 덜 벌고 더 힘든 생활이 반복됐다.


아르바이트 중에서도 내가 일한 햄버거 가게 M은 유명 프랜차이즈였는데 한 끼는 식사로 햄버거를 제공해서 만족도가 높았다. 책정된 시급은 최저시급이었지만 늦게 마감하는 날에는 5천 원 정도의 택시비도 별도 지급했고 명절에는 복지 차원에서 자그마한 쌀(3kg)도 배급(?)했다. 다만 손님이 없는 날에는 갑자기 마감을 지시하는데 그날은 가져가는 시급이 적어서 허탈할 뿐이었다.


택배 상하차는 시간 대비 고수익이었지만 하루 일하면 다음 날에는 골골되기 일쑤여서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대개 이런 일은 교외에 있는 물류센터에서 하는데 저녁 11시쯤 투입해서 곧바로 식사를 하고 휴식시간도 없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화물차에서 물건을 내리거나 쌓는 일이었다. 무한도전에서 괜히 극한 알바로 소개된 게 아니다.


공교롭게도 무한도전에 나온 극한 알바를 또 하나 경험했다. 정준하가 했던 콜센터 일이었는데 하루 200통쯤 피자 주문을 받는 일이었다. 밀려드는 콜을 받는 것도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통화하면서 상담원을 무시하고 화를 내는 고객들의 감정을 받아주느라 일이 끝나면 한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다.


택배를 제외하고 당시 내가 받은 대부분의 시급은 3480원이었는데 쉬지 않고 새벽까지 일해도 간신히 끼니만 거르지 않을 정도였다. 어떤 날은 2만 원 정도를 벌고 버스가 끊긴 시간대에 퇴근했다가 몸은 피곤했지만 택시비로 만원을 쓰기 아까워 한 시간 반 가량을 걸어가며 절약해야 했다.


아르바이트 병행으로 학업생활에 집중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수업 시간 외에도 조별 발표 같은 공동의 과제에 따로 시간을 내야 했고 동시에 아르바이트 업체가 원하는 시간대에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8학기 중 6학기 정도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했던 학점의 노예다. 근데 노예가 되는 것도 쉬운 게 아니다. 과제물이나 리포트는 양과 질에서 다른 학생들을 압도할 정도로 제출했고 출결 상태는 지각 하나 없을 정도로 각별하게 신경 썼다. 내가 하는 발표에는 완벽을 기하면서 담당 교수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장학금이 아니었다면 대충 학교를 다녔을 텐데.


몇 학기는 아무 문제없이 장학금을 받았기에 방학 때 잠깐만 일해도 부족한 학비를 벌 수 있었다. 절망적인 학기도 있었는데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딱 한 번 수업을 빼먹었던 학기다. 그 과목에서 B+학점을 받으면서 장학금을 못 받게 되었다. 당시에는 더 이상 휴학도 낼 수 없었고 어떻게든 졸업도 해야 했기에 장학금 대상자에서 탈락되는 것이 사형선고처럼 느껴졌다. 장학금 경쟁은 나날이 치열해졌다.


그렇게 복학 후 최선을 다했고 4학년 1학기에는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 생활에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 이제 내 삶에 드리운 어둠을 걷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사람이 여유가 없이 살다 보면 바보가 된다. 쉽게 말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거나 아니면 생각 자체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에서 진화한 개념이 ‘사고’라면 결정이나 통찰에 필요한 사고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졸업할 때가 되어서야 문득 잘못된 전공을 선택했다는 것을 알았다. 입학 이후에 무려 7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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