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 in Slovenia. 가장 우여곡절이 많았던 하루
슬로베니아에서의 두 번째 날이다. 우여곡절이 가장 많은 날이 아니었나 싶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 양치를 하고 옷도 갈아입고 모자 눌러쓰고 체크아웃을 했다. 8시 반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싶어서 8시 5분쯤 길을 나섰다. 후기를 읽어보니 사람이 많으면 다음 버스를 기다려야 된다는 말도 있어서 15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그렇게 버스 터미널에서 티켓도 사고 잠깐 기다렸다가 버스를 탔는데, 나를 포함해서 3명이 타서 걱정이 무색해졌다. 엄마와의 동유럽 여행, 그리고 친구들과의 여행에서 정할게 많아서 이것저것 정하다 보니 멀미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잠깐 멍도 때리다 보니 블레드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카페부터 가려고 그랬는데, 여행 책자에서는 8시라고 나와있는 오픈 시간이 구글 지도에서는 11시였다. 혹시나 해서 가보니 역시 11시 오픈이 맞아서 구경을 먼저 하기로 했다.
구경을 하기 전에 뮌헨으로 돌아갈 때 타야 되는 기차를 알아보고 출발하기로 했다. 당연히 내렸던 버스 정류장 근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50분 정도 걸어가야 되는 곳에 있었다. 블레드에는 호수 근처에 크게 2개의 마을이 있는데 하나는 호텔 많고 식당 많은 버스 터미널 동네가, 하나는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고 농사를 짓는 기차역 동네가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늘의 첫 번째 난관에 봉착했지만 호수를 따라 걸어가면 금방일 것 같았다.
걸으면서 본 블레드 호수는 아름다웠다. 물이 얼마나 깨끗한지 물속이 또렷하게 보였고, 윤슬도 아름다웠다. 드넓은 호수를 보고 있으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 같았다. 블레드 호수는 알프스의 눈이라고 불리는데, 가운데 있는 블레드 섬이 호수의 눈동자 같아서 붙여진 별명이라고 한다. 위에서 보지 않아도 블레드 섬은 아름다웠다. 놀이공원에 있을 것만 같은 성 모양이었다. 호수 한가운데 울창한 나무로 가려진 아이보리색 건물과 붉은 지붕을 보고 있으니 디즈니를 실제로 보는 것만 같았다. 사진도 열심히 찍고 가족들에게 보낼 셀카도 찍었다.
사람이 많아서 버스도, 배도, 입장도 기다린다는 후기와 다르게 블레드는 한적 그 자체였다. 커다란 호수에 관광객이 열 명 정도 되는 느낌..? 그래서인지 배도 운행을 하지 않았다. 배를 타야 블레드 섬으로 들어가는데 운행하는 배가 하나도 없어 포기하고 블레드 성을 올라가기로 했다. 난관은 아니지만 오늘의 두 번째 미스 포인트였다. 성에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등산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은 길이었다. 처음에 올라갔다가 실패하고 다른 길을 찾아 나섰는데, 처음 길은 돌길, 두 번째 길은 흙으로 된 길이었다. 아침이라 흙으로 된 길이 축축하고 미끄러워 결국 첫 번째 길로 돌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 10분 더 걸으니 갑자기 길이 막혀있었다. 물어보니, 길이 공사 중이라고 한다. 그렇게 오늘의 세 번째 미스 포인트와 함께 성에 오르는 것도 포기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호수라서 그런지 꽤나 추웠다. 어제 류블랴나도 추웠는데, 아침이라 그런지 물가라서 그런지 블레드는 체감상 5도 정도가 낮은 느낌이었다. 손이 얼고 핸드폰 배터리가 빨리 닳기 시작하고 모자를 눌러쓴 머리까지 추워지는 것 같아 급하게 들어갈 곳을 찾아봤다. 식당과 카페들이 거의 11시나 12시부터 영업을 시작해 간단한 푸드마켓 같은 곳에 갔다. 11시까지 20분 정도가 남아 크로와상 하나를 먹으며 몸을 녹였다. 잠깐 쉬다 보니 어느새 11시가 되어 바로 옆에 있는 카페로 갔다.
블레드에 또 유명한 게 있다면 ‘블레드 크림 케이크’이다. 블레드 크림 케이크의 원조인 카페에 찾아왔다. 파크 호텔에 있는 파크 카페가 원조라는데, Kavarna park라는 곳이었다. 호수가 잘 보이는 곳에 앉아 따뜻한 라테와 블레드 케이크를 주문했다. 나온 케이크를 보니 아래에는 바삭한 패스츄리, 중간에는 두꺼운 커스터드 크림 층이 있었고 그 위에는 휘필 크림 같은 크림 층이 또 있었다. 맨 위에는 패스츄리가 한 겹 더 있었고, 위에는 슈가파우더가 듬뿍 뿌려져 있었다. 한 입 먹어보니 그렇게 느끼하지 않고 부드러운 케이크 맛이었다. 우리나라 호텔에서 먹어볼 것 같은 맛이었다. 맛있게 먹었는데, 아무래도 느끼해서 절반 정도만 먹었다. 맛있게 먹고는 호수를 멍하니 바라보며 잠깐 앉아있다가 기차 시간에 맞춰 길을 나섰다.
기차역을 찍고 출발하니 50분이 걸린다고 나와서 1시간 5분 전에 출발했다. 처음에는 호수를 따라 걷다가 마지막 20분 정도는 마을을 따라 올라가는 코스였다. 한적한 마을이라 그런지 길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낮 12시인데도 살짝 무서웠다. 그래도 파워워킹으로 걸으니 오히려 슬로베니아의 시골을 보는 것 같아 재밌었다. 집집마다 개를 키우고, 집 앞에는 장작이 가득했다. 장작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신기했다. 유럽 시골은 이런 건가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걸었다. 그렇게 역까지 걸어 2분 정도가 남았을 때,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분명 역으로 가야 되는데, 역은 언덕 아래 있고 언덕은 도저히 내가 내려갈 수 없는 절벽 수준의 경사였다. 구글 지도에서는 이 언덕을 통과하라는 점선이 보였는데, 썰매도 스키도 못 탈 것 같은 거의 70도의 경사라서 당황했다. 오늘의 네 번째 난관이었다.
알고 보니 역으로 찍으면 이상하게 나오고, 역 안에 있는 카페로 찍어야 맞게 나오는 것 같았다. 제대로 찍으니 15분이 걸린다고 나와서 기차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반은 걷고, 반은 뛰어서 다시 걸어가니 11분 만에 도착했다. 그렇게 숨을 돌리며 기다렸는데, 기차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기차가 들어올 기미가 안 보였다. ‘여기도 연착이 심한가’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 예정 시간 한 2분 뒤에 갑자기 옆에 같이 기다리시던 할아버지께서 다가오셔서 “예세니체?”라고 물어보셨다. 미리 말하면 나는 블레드(Bled Jezero)-예세니체(Jesenice_슬로베니아와 오스트리아의 경계)-빌라(Villach_오스트리아)-뮌헨의 경유 일정이라, 예세니체가 맞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게시판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슬로베니아어로 적혀있어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빨간 글씨로 ‘Bled-Jesenice’가 적혀있고 날짜가 적혀있었다. 대충 이 기간에는 운영하지 않는다는 뜻 같았는데, 오늘이 하필 그 기간의 첫날이었다. 오늘의 다섯 번째 난관이다. 순간 당황해서 정지해 있으니, 할아버지께서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을 하셨다. 인포메이션에 가자는 건가 싶어서 따라가니, 기차역 건너편에 버스가 한 대 서있었다. 거기로 안내해 주셔서 일단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에 사람이 많이는 없었는데, 순간 무서워졌다. 나를 도와주신 친절한 분이지만, 이렇게 아무런 생각 없이 덜컥 타도 되는 건가? 혹시라도 이게 이상한 길을 가는 버스면 어떡하지? 싶어서 일단 내려서 알아봐야 되나 싶던 찰나에 관광객처럼 보이는 가족과 역무원 유니폼을 입으신 직원 분께서 들어오셨다. 갑자기 안심이 되어 앉아있었고, 버스는 출발했다.
버스는 기차 시간보다 20분 정도 늦게 도착했지만 나는 원래 3시간의 경유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좋았다. 그렇게 예세니체에 무사히 도착했다. 예세니체는 슬로베니아와 오스트리아의 경계에 있는 도시인데, 작은 마을이다. 3시간 경유가 심심할 것 같아 찾아보니 관광할 곳은 없는 것 같았고, 한국인 후기도 하나도 없었다. 여기가 국경 지역이고 슬로베니아의 물가가 저렴해서인지 오스트리아에서 장을 보러 많이 오는 지역인 것 같았고, 실제로 큰 마트가 몇 개 있었다. 나는 마트 구경을 좋아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길을 걷다 보니 산이 사방으로 있는 동네인 것 같았다. 산 한가운데 요새처럼 있는 마을이었는데, 사는 사람도 많았다. 실제로 역가 슬로베니아에서 열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라고 하는데, 그런 도시가 이렇게 산 안에 있는 게 신기했다.
추위를 뚫고 첫 마트로 들어갔다. 마트 여러 개가 줄지어 있었는데, 모두 창고형 마트이고 주변에 산이 많아서 미국 서부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리뷰에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큰 마트인 것 같다는 얘기가 있어 기대했는데,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첫 마트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사지는 않았고, 두 번째 마트로 향했다. 이 마트는 전 마트와 다르게 향신료 코너가 크게 있어서 구경해 봤다. 한국인의 맵부심을 가지고 집에 매운 가루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남아프리카의 고춧가루와 파프리카 가루 중에 고민하다가 고춧가루는 스코빌 지수가 3000에서 4000 사이라고 해서 쫄아서 파프리카 가루를 선택했다. 그렇게 파프리카 가루 하나와 야식으로 뜨끈하게 먹을 일본 컵라면도 샀다.
만족스러운 쇼핑 후 역으로 돌아가 카페에서 쉬기로 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려고 앱에 들어가니 뜻밖에 알림이 와있었다. 내가 타야 되는 중간 열차가 20분이 지연된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경유 시간은 9분이었기 때문에, 이대로 가면 다음 기차를 못 타는 것이었다. 여섯 번째 난관의 시작이다. 원래 기차를 타더라도 밤 9시 41분에 도착하는 늦은 일정이라 걱정했는데, 다음 기차를 타면 12시 넘어서 도착하는 게 가장 빠른 연결 편이었다. 예세니체에서 빌라까지 가는 방법을 찾아봐도 국경을 넘어야 해서 기차가 유일한 방법이었고, 빌라에서 뮌헨까지 가는 다른 방법을 찾아봐도 12시 넘어서 도착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차라리 플릭스버스를 타고 내일 새벽에 도착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알아봐도 나오지 않았다. 독일 기차의 지연에는 대비하고 있어도 슬로베니아 기차의 지연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기에 패닉이 왔다. 역까ᆞ지 걸어가는 15분 동안 모든 가능한 교통편을 찾아봐도 12시 넘어 도착하는 다음 기차를 제외하고는 방법이 없었다.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예세니체 역의 역무원 분께 여쭤보니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셨다. 결국 포기하고는 카페로 들어와 뮌헨의 치안에 대해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9시 41분도 늦다고 걱정했는데 12시 18분이라니 그것도 유럽에서! 무서웠지만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아 체념하고 커피와 크로와상을 주문했다. 마음을 비우고 느긋하게 카페에 앉아서 다음 연결 편이 지연되기를 빌고 있었다. 그러고 한 입 먹은 크로와상은 감동의 맛이었다. 데우는데 10분이 걸려 뭐지? 싶었는데 인생 크로와상이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하고 안에 초콜릿 필링은 달지 않고 너무 뜨겁지도 않고 적당해서 유럽에 와서 먹은 수많은 크로와상 중 당당히 1등을 차지하는 감동의 맛이었다. 달달한 걸로 진정하고 나니 왠지 12시 18분에 도착해도 집에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고 또 30분 뒤에 앱에 들어가 보니 갑자기 기차의 지연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20분에서 10분으로 줄고, 한 15분 뒤에는 5분까지 줄어들었다. 갑자기 희망이 보여서 빌고 또 빌었다. 열차 시간에 임박해서는 3분까지 줄어들어 나에게 주어진 환승 시간이 6분이 되었다. 그렇게 감격스러운 상태로 열차를 타러 나갔는데, 여기는 플랫폼 표시도 없었다. 역무원에게 물어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플랫폼을 찾고 드디어 열차에 탑승했다. 탑승하는 순간까지 긴장했다가 열차에 올라서면서 긴장이 약간 풀어졌는데, 3분이 지나도 열차가 출발하지 않았다. 1분만 정차했다가 출발해야 되는 열차라서 당황하고 있었는데, 열차는 5분이 지나서 출발을 했다. 나에게 주어진 환승 시간은 1분으로 줄었다. 32분을 이동해 환승하는 것이었는데, 32분 동안 또 간절한 기도를 시작했다. 여기서 타지 못하면 2시간을 기다려 다음 기차를 타고, 환승도 한 번 더 해야 되기 때문에 32분 내내 가방을 한 번도 풀지 않고 정자세로 기다렸다. 다행히 열차가 빠른 속도로 가서 나에게 3분의 환승 시간이 주어졌다. 도착 5분 전부터 문 앞에 기다리다가 도착하자마자 뛰어나갔다. 지하로 내려가 플랫폼을 확인하고, 다음 플랫폼까지 무사히 뛰어갔다. 그러고 마지막 열차에 탑승해서야 긴장이 약간 풀어졌다. 이제 집에 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 4시간 32분 기차도 반갑고 설렜다. 가는 동안 유튜브도 보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여행 계획도 세웠다. 달리고 달려 열차는 뮌헨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안도감이 들었다. 집이라는 게 참 이상한 것 같다. 본 지 44일 되었고, 여행 간 기간을 제외하면 한 달도 살지 않은 낯선 땅의 낯선 곳인데 ‘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안정감을 주는 공간으로 바뀌는 게 신기하다. 그렇게 Uban을 타고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짐부터 정리하고, 샤워도 하고 잠깐 놀다가 잠에 들었다. 유럽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슬로베니아라는 나라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런 나라를 1박 2일로 다녀왔다는 게 아직 믿기지 않는다. 소소하고 예쁘고 평화로웠던 나라, ‘소확행’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나라였다.
<오늘의 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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