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오는 이런 오후에
45일 차라니 어느덧 제법 혼자 유럽살이 전문가가 된 기분이다. 어젯밤에 슬로베니아에서 돌아와 오늘은 쉬면서 다음 여행을 준비하는 날이다. 다음 여행은 바로 내일인데, 엄마와 함께하는 동유럽 여행이다. 가족들과 헤어진 지 45일이 지나 드디어 만나는 것이다.
준비할게 많아서 일찍 일어났다. 늦게 잤는데도 기대감 때문인지 알람을 듣자마자 눈이 떠졌다. 밀린 빨래도 있고, 덮고 자야 되는 담요도 한 번 더 빨아야 해서 빨래부터 돌렸다. 그러고는 마트로 가서 물이랑 파스타 소스를 사고, 점심으로 먹을 빵도 샀다. 담요가 2개나 있어 빨래를 나눠 돌렸더니 1시간 반이 걸렸다. 그렇게 완성된 빨래를 가져와 널어놓고는 브런치를 만들었다. 오늘은 본격적인 냉털 날인데, 냉털에 딱인 과일샐러드를 만들었다. 방울토마토와 살구, 귤 그리고 부라타치즈를 예쁘게 담고 발사믹을 뿌려 마무리했다. 카톡으로 생기부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읽으며 밥을 먹으니 시간이 금방 갔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초등학교의 기록도 재밌었고, 고등학교 때의 기록은 얼마 전이라서 기억도 새록새록 나고 괜히 뿌듯해서 열심히 읽었다. 세특, 진로 이런 게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역시 재밌는 건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부분이다. 재밌는 내용이 나오면 가족들한테 자랑도 하면서 30분 동안 읽었다.
설거지를 하고는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께 전화도 드리고, 화장도 하고 집을 나섰다. 메인 목적은 아시안마트이지만, 쇼핑을 하고 싶어서 여기저기 구경하고 가기로 했다. 옷도 구경하고, 신발도 구경하면서 걸어가다 보니 스타벅스가 눈앞에 나타났다. 독일 스타벅스를 가보고 싶어서 무작정 들어갔다. 여기서만 볼 수 있는 메뉴를 주문하고 싶어서 lebkuchen latte를 주문했다. 뭔지도 모르고 주문했는데, 궁금해져서 음료를 받으면서 여쭤보니 진저쿠키 라떼라고 알려주셨다. 이런 겨울 감성 낭낭한 음료를 좋아해 기대를 잔뜩 하고 2층 자리로 올라갔다. 한 입 마셔보니 딱 상상하던 겨울의 맛이었다. 익숙한데 설명할 수는 없는 겨울 시즈널 라떼의 정석적인 맛이랄까..? 그리고 독일도 스타벅스는 카공의 공간인 것 같았다. 다들 노트북이나 아이패드를 가지고 계셨고, 조별과제처럼 보이는 테이블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아이패드를 테이블에 두고 나갔다 오기도 했는데, 유럽에서 전자기기를 버려두고 나가는 모습을 처음 봐서 당황스럽기도 신기하기도 했다.
포근한 라떼를 마시고 드디어 아시안마트로 갔다. 집에서 나선 지 거의 3시간 반 만이었다. 엄마랑 먹을 햇반이랑 라면을 골라서 귀가했다. 놀랍게도 여기는 오늘 첫눈이 내렸다. 처음에는 조금씩 흩날리다가 집으로 걸어갈 때는 쏟아졌다. 11월인데도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게 신기했다.
저녁으로는 양배추 계란 볶음과 컵라면을 먹었다. 어제 사 온 일본 컵라면이었는데, 일본에서 먹은 컵라면이랑 맛이 비슷하면서도 달라서 신기했다. 설거지도 하고 샤워도 하고 짐도 챙겼다. 엄마가 뭐를 필요로 할지, 뭐를 좋아할지를 생각하면서 열심히 챙겼다. 대청소도 한 바퀴 하고는 오늘의 일과가 끝이 났다.
쉬면서 내일의 여행을 알아보는 게 마지막 일정이었는데, 교통편을 알아보다 보니 원래의 계획에서 정신적, 체력적으로 힘들 것 같은 구간이 있었다. 체스키에서의 1박인데, 가는 길에 버스에서 내내 캐리어 도난을 걱정해야 된다고 그러고, 가서도 버스 터미널에서 중심지까지 베네치아보다 더한 돌길이라서 예상 시간의 9배가 걸렸다는 말을 듣고 고민에 빠졌다. 이게 맞는 건가..? 3시간이면 둘러본다는 마을을 위해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게..? 싶어서 급하게 호텔을 취소하고 다음 호텔을 알아보고 교통편도 알아봤다. 급하게 했는데 다행히도 착착 구해져서 계획을 무사히 수정할 수 있었다. 그러고 한국 시간에 맞춰해야 될 일이 있어 새벽 2시까지 기다렸는데 밤이 늦어지니 또 피곤함이 약간 없어져서 갑자기 글을 와다다 쓰고 있다.
하루종일 이런저런 준비를 하면서 느낀 게 있다. 스스로 얘기하기 낯 간지럽지만, 성장이다. 나 하나 챙기기도 벅찼던 시절이 있었고(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항상 챙겨주시는 건 부모님이었다. 여행을 가도 뭐를 입을지, 뭐를 챙길지 그리고 뭐를 먹을지까지 일과의 대부분에 있어 도움을 받았다. 오늘은 달랐다. 내가 엄마를 생각하며 옷은 이걸 챙길까, 음식은 이걸 챙길까 이것도 챙길까 고민하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겨울 가족여행까지만 해도 내 짐 하나 챙기기 힘들던 때가 있었는데 11달이 지난 지금, 챙김만 받았던 엄마를 조금씩 챙길 줄 알게 된 것이다. 여행에 와서 배우는 게 없을까 봐 걱정도 고민도 많았는데, 특별하게 발전한 건 없어도 이런 소소한 변화면 충분하지 않을까. 괜히 뿌듯해지는 하루였다.
가족이 주는 기분은 신기한 것 같다. 엄마가 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렇게 들뜰 수 있는 건가 싶고 이렇게 꼼꼼해질 수 있는 건가 싶어 놀랍다. 아까도 들뜬 마음 때문인지 과일을 썰다가 손을 약간 다쳤다. 열심히 알아보고 준비한 만큼 최대한 차분하고 재밌고 행복하게 여행하고 추억을 많이 만들고 싶다.
<오늘의 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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