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해양 전문가와 같이 살면

by 정숙진

우리 집엔 조선해양 전문가가 한 분 계신다.


조선해양이 뭐냐고 하면...음...뭐...조선(造船)과 해양(海洋)이니 배와 해양 산업에 필요한 전문 지식이라고 보면 된다. 내 브런치 글을 꼬박꼬박 챙겨 보는 우리 집 조선해양 전문가, 즉 이 글의 주인공에게 간단히 설명해달라 부탁하면 되지만, 이 사람은 '간단히'가 안 된다. 말이 길어질 것이 뻔하다. 전공자만 이해하는 말로 풀어놓는 경향도 있다. 설명을 다시 설명해달라고 할 지경이다. 그래서 걍 비전문가인 내가 나서는 편이 낫다. 조선해양이라는 주제로 내 브런치를 찾는 사람은 없을 테니, 신경 안 쓰련다.


아무튼, 집에 조선해양 전문가 한 분 정도 있으면 좋다. 뭐가 좋으냐 하면...



선박과 해양 관련 뉴스가 나오면 즉석에서 해설을 달아준다


가장 최근 도움을 얻은 뉴스라면 올 3월에 있었던 수에즈 운하 마비 사고가 있다. 또한

2014년 4월 세월호 사고

2010년 4월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고

2007년 12월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


등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전문가의 해설을 듣는다고 다 이해되는 건 아니다. 전공자들만 쓰는 용어를 주로 나열하니 알아듣기 힘들다. 그래서 내 눈높이가 어느 정도인지 이 전문가에게 매번 일깨워줘야 한다. 해설 과정이야 어떻든 나는 궁금증이 해소되니 속이 시원하다.



영국에는 해양박물관이 많다. 우리 가족은 박물관 가이드를 매번 데리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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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다녀온 해양박물관이다.



미술관에서도 조선해양 전문가가 활약한다


참고로 우리 집 조선해양 전문가는 미술관에 관심이 없다. 이 사람에게 억지로 권하지는 않고, 내가 관람하는 동안 옆에 앉아만 있어달라고 했다. 그런데 우연히 전시 작품 중 배 그림 하나를 발견하고 상황이 달라졌다. 배도 그냥 배가 아니다. 잠수함이다. 미술관 구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사람이 내 호출 한 번에 뿅 하고 다시 나타났다. 역시 전문가는 다르다. 언제 어느 상황에서도 전문가 모드로 돌변한다. 목에 힘부터 들어간다. "이 잠수함이 말이야..."


HMPS_SCAG_1315-001.jpg 사진: Bridgeman Images


문제의 그 그림이다. 물론 그림에는 문제가 없다.


언뜻 보고 거북선처럼 노가 달린 배인가 했더니, 작품 제목이 “잠수함 수리 (Repairing a Submarine)"라고 되어 있다. 당연히 나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럴 때 조선해양 전문가가 침묵하면 예의가 아니지. 비록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졸고 있던 미술관에서지만, 자신의 전공 분야를 발견하고 소홀할 수 없다. 내가 노라고 착각했던 구조물이 건설 현장과 조선 분야에서 쓰이는 가설물인 '비계'라는 것이다.



배와 관련된 주제가 나오면 누구보다 이 사람이 앞장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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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학교에서 배 만들기 숙제가 나왔다. 누군가가 또 목에 힘주며 자신의 실력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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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 하다, 이제는 먹고 남은 멜론 껍질까지 배로 만든다.



공대 출신이라 가능한 일이 많다


공대생끼리는 같은 과가 아니더라도 수업이 겹친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분야도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배 말고도 비행기, 자동차 이런 거 다 뭉뚱그려 이해한다 (고 하더라). 각 전문가들 입장에선 그게 어떻게 같냐고 하겠지만, 초등학생 수준에서는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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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잘라낸 종이접기 도면으로 두 부자가 자동차와 비행기를 만들던 날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집 조선해양 전문가가 찾던 배 모형의 종이접기는 없었다. 차선책으로 비행기와 자동차 접기로 만족해야 했다.


이런 초딩용 만들기 과제에 열과 성을 다하느라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는 전문가다. 아들 꺼 뺏어서 혼자만 하지 말고 아들 좀 끼워주라고 내가 중재를 해야 할 판이다.



조선해양 전문가랑 살면 힘든 점도 있다. 뭐가 힘드냐 하면...



평소에도 배에 관한 말을 많이 하는데 배를 타면 본격적으로 배 얘기만 한다


자신의 전문 분야가 눈앞에 떡하니 펼쳐지고 그걸 타고 바다 위를 질주까지 하는데 가만있으면 조선해양 전문가가 아닌 것이다. 즉석에서 강연을 펼친다. 웬만하면 들어주면 좋겠지만, 문제는 내가 뱃멀미가 심한 편이라는 점이다.


배든 자동차든 멀미를 하는 사람은 내 심정을 알리라. 되도록 이 지옥 같은 순간이 빨리 끝나기를 기도하며....조용히...버티고 싶다. 내가 배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싶을 뿐이다...허나...이 조선해양 전문가가 가만 내버려 두질 않는다. 배 전문가답게 뱃멀미도 안 한다.


어떤 기분인지 한 번 상상해보라. 참, 멀미를 해 본 적 있어야 조금이라도 내 입장을 이해한다. 차멀미, 뱃멀미도 좋고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나 바이킹을 격하게 타고 내려온 순간을 떠올려도 된다. 그럴 때 옆에서 쉴 새 없이 떠드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


"저기 보이는 배가 로로선이고…"

"저 CMA CGM 회사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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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선 대기 -> 승선 -> 배 출항 -> 하선 -> 숙소 도착에 이르는 장장 세 시간여 여정이 진행되는 동안, 이 전문가는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배와 해양 구조물은 물론 관련 업계 동향까지 끊임없이 들려준다. 진정한 전문가는 비전문가가 뭘 모르는지도 안다. 자기는 훤히 아는 내용이라도 상대가 모를 것 같은 걸 속속 집어서 알려준다. 완전 족집게 과외 선생이다. 그런데 나는 과외 신청한 적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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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현재 타고 있는 배는 물론 저기 바다에 떠있는 모든 배와 구조물이 오늘의 강연 주제입니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아들도 멀미를 한다. 그런 아들 앞에서도 조선해양 전문가의 강연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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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또?"

아들이 한 손에 멀미 봉투를 쥐고 있을 때다.



우리 집 조선해양 전문가의 이런 전공에 대한 열정은 내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


나와 이 전문가는 같은 학교의 사범대생과 공대생으로 만났다. 나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다. 이 공대생이 공업수학인지 뭔지 강의를 듣고 와서 강의를 통째로 브리핑해도 들어줬다. 신호등 설계?...이게 조선해양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하여간 이 신호등 수업 내용을 내 앞에서 재연해도 열심히 들어줬다. 문과 출신인 내가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래서 모르는 내용이 태반이지만 간간히 내 수준에서 질문도 하며 이해하려 노력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들어주는 나의 태도에 공대생이 감동한 것 같다. 그래서 결혼까지 한 걸로 보인다. 그래서 지금도 배와 바다 이야기를 들어주며 살고 있다.


어쩌겠나, 앞으로도 듣고 살아야 할 것 같다. 조선해양 전문가 때문에 영국에도 오게 되었고 역시 조선해양 전문가를 필요로 하는 바다 가까운 곳에 산다. 다른 지역보다 배 타는 항구도 가깝다. 그래도 나는 크루즈 여행이 싫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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