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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Oct 14. 2021

버스기사가 우릴 계속 쳐다봐요

영국에서 대중교통 이용하기

영국의 한 버스정류장에 있는 표지판이다.  


geograph.org.uk


이런 표지판은 승객의 편의를 위해 세워진 것이기는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외국인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승객이 뜸한 지역에 세워진 표지판이라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더욱 불편하다. 이를 엉뚱하게 해석했다가 버스를 잘못 타거나 애써 기다린 버스를 놓치기도 한다. 


위 표지판의 문구를 해석하면

간이 정류장  
(현재 역) St George's Way / Burgess Park  
(종착역 혹은 경유역) London Bridge 
(버스 번호) 343, N343 (심야 버스)


의 뜻이다. 


Request Stop의 사전적 의미는 '간이 정류장'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세워달라는 요청 (Request)이 있어야 버스가 선다는 뜻이다. 불필요한 정차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다. 행선지와 버스 도착 시간까지 표시하는 전광판 시설을 갖춘 곳도 많지만, 이용객이 적은 동네에는 이런 표지판 하나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에 ~~


영국에도 이 노래 가사처럼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이 있다. 아래 사진처럼 역무원이 없는 작은 역사에는 승객이 요청할 때만 기차를 세워준다. 버스 정류장에 이어 기차역도 Request Stop인 셈이다.


twitter.com




아들과 함께 20여 분 거리에 있는 마트에 다녀오는 길이다. 


집 근처에 다다르니 정류장에 버스 한 대가 도착해 승객을 태우고 있다. 버스가 도착한 걸 멀리서부터 보면서 걸어왔는데 우리가 가까이 다가설 때까지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차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더 이상 내릴 사람도 탈 사람도 없고 버스가 고장 난 것 같지도 않다. 의아해서 버스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기사가 우리 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혹시나 우리 등 뒤로 괴이한 광경이라도 펼쳐지나 싶어 돌아봤지만, 거리는 한산하고 도로에도 큰 변화가 없다. 그래서 다시 버스로 시선을 돌리니 이번에는 승객들까지 목을 빼고 우리를 쳐다본다. 


방금 전 들렀던 마트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 사이를 오갈 때는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우리를, 버스 창문 너머 저 사람들은 왜 쳐다볼까? 영문도 모른 채 우리에게 향하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아들의 손을 잡고 황급히 집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며칠 뒤. 


이날도 평소처럼 쇼핑을 마치고 마트를 빠져나와 집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향해 걷는데, 이번에는 마트 입구에 지난번과 같은 버스가 서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이...다시 반복되는 버스기사의 시선, 뒤이어 승객들까지 합류하는 분위기까지...


설마, 우리를 버스에 탈 승객으로 간주한 것인가? 버스를 눈앞에 두고도 아들과 대화를 이어가며 느릿느릿 걷고 있는 우리를?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장바구니까지 든 사람을 배려하는 영국인의 지나친 친절함과 인내심이었을까? 늘 비슷한 시간에 집을 나서기는 했다만, 노선도 다양하지 않고 배차 간격도 뜸한 정류장임에도 우리가 산책을 나갈 때마다 그 어떤 버스든 막 정류장을 들어서거나 정차해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버스가 보이면 최대한 도로변에서 떨어져 걷기로 했다. 아들에게 "와, 저거 봐, 신기하지?" 하며 늘 보던 특별할 것도 없는 나무나 꽃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이다. 우리를 지켜볼 누군가에게 "우리는 버스 탈 일 없으니 신경 쓰지 말고 차 출발시키세요"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의미에서다.


이 정도로 과장된 몸짓을 보였으면 충분하다 싶은데...그럼에도 버스는 지나가지 않는다. 따가운 시선이 벌써부터 느껴지는 버스 쪽으로 억지로 눈을 돌려보니, 기사가 아예 몸을 반쯤 일으켜 우리를 쳐다본다.


아...우리, 버스 안 탄다니까요!


분명, 그 정류장은 Request Stop이 아니었으리라. 


커버 이미지: Photo by Sandy Ravaloniaina on Unsplash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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