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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Nov 22. 2021

영국에서 강제 소방훈련을 받던 날

영국에서 만난 사람

"앗... 이런... 또?... &*#$@!$%#$*_@$%..."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곧 눈과 목이 따가워지고 조금 더 있으면 화재경보가 울릴 것이다. 

공기가 역해서 호흡도 괴로울 테니 곧장 밖으로 나가는 편이 상책이다.

그리고 소방차도 출동하겠지. 


하던 일을 중단하고 건물 밖으로 나가야 한다. 벌써 나와서 차가운 밤공기에 벌벌 떨며 기다리는 주민도 있겠지. 남편과 나는 TV를 보며 일요일 밤을 여유롭게 보내던 중이다. 나는 내일 오전 일찍 출근하고 남편은 학교도 가야 하는데, 이게 뭔 소동이람.


영국에 처음 와서 남편과 둘이서 학교 기숙사에 거주하던 시절이다. 


어느 일요일 밤, 기숙사 창문을 통해 매캐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처음에는 제법 향긋함이 배어 있길래 '누군가 강렬한 향신료를 넣어 요리하나 보군'했더니 얼마 뒤 눈과 목이 아프기 시작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입주자 대다수가 외국인 유학생과 이들의 배우자로 구성된 기숙사이다 보니, 끼니때마다 낯선 음식 냄새가 건물 곳곳에서 번져 나오곤 했다. 정체불명의 음식 냄새에 적응해 가던 중, 우리 부부 또한 기숙사 내 유일한 한국인으로 타인들에게 낯선 냄새를 풍기며 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냄새와 함께 올라오는 연기가 심상치 않았다. 


지하층에 사는 커플의 소행임이 틀림없다. 이들은 주말 밤마다 연기를 피우며 요리인지 실험인지 하는 것 같았다.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연기에 위층 우리가 견디기 힘들 정도면 각 층에 배치된 화재경보기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기숙사 건물 전체에 화재경보기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권투 시합에서 라운드 시작을 알리는 종을 귀에 대고 쉼 없이 치는 듯했다. 


영국의 소방법이 얼마나 엄격한지, 특히 학교 기숙사에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또 화재 발생 시 어디로 대피해서 어떻게 대처하는지 몸소 배우는 기회를 만들어준 커플이다. 


한 번 체험으로는 부족하다 싶었는지 이후 두어 차례 더 냄새와 연기를 피워 기숙사 주민들로 하여금 확실하게 소방훈련법을 익히게 해 준, 어쩌면 고마운 커플이기도 하다 (이런... &*#$@!$%#$*_@$% 같으니...).


첫머리에 언급한 사건이 바로 그런 날 중의 하나다. 


영국의 학교와 기숙사, 회사 등 다수의 사람들이 모이는 건물에서 화재경보가 울리면 실제 화재 여부와 상관없이 내부에 있던 사람은 모두 밖으로 나가야 한다.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건물 밖 지정된 장소에 모여야 한다. 


이날도 경보기 소리를 듣고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들이 화재대피소로 모여들었다. 


기숙사 입구 마당 한편이 대피소에 해당한다.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가 급히 깬 듯 잠옷인지, 속옷인지 모를 차림의 사람도 보였다. 다른 기숙사에서는 샤워 도중 뛰쳐나와 머리와 몸이 젖은 상태로 수건만 걸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소동에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꾸물대거나 건물로 다시 들어가면 벌금형이 처해지기 때문이다.  


seton.co.uk


위 사진처럼 녹색 표지판이 대피소의 위치를 알린다. 


주로 건물 앞 넓은 공터나 주차장에 위치한다. 영국에는 이런 표지판이 부착된 공간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신입생과 신규 직원을 대상으로 화재 발생 시 행동 요령과 화재대피소 위치에 대한 교육을 실시한다. 


경보기가 울린 지 10여분이 지나자, 예상대로 기숙사 입구에 소방차 한 대가 출동했다. 소방차에서 내린 소방대원은, 멀쩡한 건물 상태와 무심한 듯 서있는 기숙사 주민들의 얼굴을 보고 안심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일은 일이다. 


건물 내부 곳곳을 점검한 뒤 우리가 모여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온 소방대원이 질문을 던졌다.



"누가 그랬어요?"


누가 화재경보기를 자극할 정도로 일을 벌였냐는 질문이겠지. 


하얀 연기와 함께 강렬한 냄새를 풍기는 집이 기숙사 건물 전체에 한 곳 밖에 없을 텐데, 이 소방관은 직접 가보고도 왜 물어볼까? 다시 생각해 보니, 어느 집인지는 알지만 그 집에 누가 사는지는 당장 몰라서겠지. 큰 화재로 번지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겨야겠지만, 책임 소재는 엄격히 따져야 한다.


이런 일이 처음 발생했을 때만 해도 아무도 먼저 나서지 않더니, 이제 모두가 시달릴 만큼 시달렸나 보다. 주말마다 지독한 냄새와 함께 연기를 피우던 문제의 커플로 다들 시선을 돌렸다. 어떤 학생은 대놓고 그 커플을 손으로 가리키기까지 했다. 



이제 소방훈련은 그만 좀 했으면...

주말 밤 시간을 평화롭게 보내게 해 달라고요! 

눈물 콧물 흘리며 한밤중에 밖으로 뛰쳐나오는 일 좀 그만하자고요!



이후 이 말썽쟁이 커플이 기숙사에서 강제 퇴거를 당했는지 아니면 연기 피우는 일을 그만두고 조용히 지내는 건지, 화재경보가 울리는 일은 없어졌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Denys Argyriou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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