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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Apr 21. 2023

꽃에 대해 공부하다가 발견한 사실

요즘 꽃에 대해 공부하는 중이다.


꽃집을 운영하려고?

원예학을 전공하려고? 

정원 관리에 신경 쓰려고?


그건 아니고... 


꽃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삶의 재미가 더해질 것 같아서다. 


사계절 꽃으로 둘러싸인 영국에서 살다 보니 주변 꽃들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한국에서는 보지 못하던 꽃까지 더해지니 나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영국에서 읽은 책에, 꽃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꽃을 모른다고 면박당할 정도는 아니고, 단순히 내 만족에서 하고 싶을 뿐이다. 취미로 춤을 공부하거나 골프 혹은 뜨개질을 익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꽃에 대한 관심은 비단 여자인 내게만 쏠리는 현상은 아닌 듯하다. 



"작년 겨울에 심었던 수선화가 오늘 첫 꽃망울을 터트렸다."

"이맘때 꽃이 활짝 폈던 것 같은데, 이웃집 동백이 올해는 한송이 밖에 안 보이네."

"라벤더 향이 꽤 오래가네."


남편은 재택근무를 하다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정원으로 나가 맨손체조를 하는데, 이럴 때마다 목격하는 주변사항을 내게 보고해 준다.



"우리 집 토양에는 이 꽃을 심으면 좋다고 하네요."


아들이 이렇게 말하며 봉투 하나를 내게 보여줬다. 내가 마트 입구에 서서 그날 산 물건을 정리해 장바구니에 담고 있는 동안, 아들은 씨앗 판매 코너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아들이 말하는 토양은, 우리 집 정원 끄트머리에 자갈로 덮여 있던 자리다. 우리 가족이 이사 오면서 이 자리를 걷어내고 텃밭으로 만들었지만, 오랜 세월 빛을 보지 못하던 땅이라 그런지 뭘 심어도 잘 성장하지 않았다. 이런 토양에 더 어울리는 식물이 있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요, 그런 걸 찾아낸 아들은 더 신기했다.



그럼, 내게 맞는 책을 골라볼까?


공부라고 해서 책을 펼쳐놓고 장시간 꽃 하나하나를 분석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공부 동기가 단순한 만큼 공부 방법도 단순하다. 내게는 꽃 이미지와 이름만 있으면 충분하다. 재배 방법과 원산지, 개화 시기, 꽃말까지 상세히 파악하고 싶지는 않다. 이건 아마 나이가 더 들거나 정원 관리를 취미로 삼는 시기가 온다면 관심사가 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 몇 해 전, 헌책방에서 구매한 카드 형태의 꽃 설명서다. 사실, 이 무렵부터 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카드를 한 장씩 펼쳐가며 영어 이름을 외우고 한글명도 찾아 적는 일을 몇 차례 했지만, 곧 흥미를 잃고 말았다. 실물 사진이 아닌 그림에서 오는 한계 때문이다. 내게는 생소한 꽃을 그림만으로는 분별하기 힘들어서다. 또한, 야생화보다는 내가 자주 다니는 길목에 누군가 심어놓은 꽃이 더 궁금했으니. 



인터넷에서 Flower, Photo, Name 이 세 단어를 적절히 조합해 검색했더니, 결국 내가 원하는 책이 나타났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도 함께였다.




↑ 눈치챘는가? 



모두 Alzheimer와 Dementia라는 단어가 공통으로 들어간다.


꽃 사진과 이름만 가지고 단순하게 공부하겠다는 내 목적에 꼭 들어맞다 싶었던 책들이 실은 알츠하이머와 치매 환자용으로 제작된 셈이다. 생각해 보니, 나처럼 꽃 사진과 이름만 참조하려고 책을 사는 사람은 드물지 싶다. 


영국에 온 이후 자연스럽게 꽃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이런 사진을 보고 저절로 흐뭇해하는 나 자신이다. 그렇다면, 수십 년간 영국 토박이로 살아온 이라면 꽃에 대한 애정과 추억이 나보다는 강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알츠하이머나 치매를 앓는 이를 가까이 대한 적도 없고 병에 대해 깊이 관심 가져본 적도 없다. 짐작건대, 기억을 상실해 가는 환자의 뇌를 자극하기 위해 친숙한 사물이 담긴 사진을 활용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이의 가족에게 이런 책을 선물하면 좋겠다 싶었다. 덕분에 나는 책의 본래 용도와는 어긋나지만 흥미로운 공부 자료를 구한 셈이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어떤 꽃이든 사진과 이름을 금방 찾아내고 관련 정보도 나올 텐데, 왜 굳이 종이책으로 사려 하나? 


90% 이상의 독서를 오디오북에 의존하고 웹사이트 내용도 너무 길다 싶으면 파일로 변형하여 읽어주기 기능을 활용하지만, 꽃을 공부할 때는 다른 방식이 필요했다. 영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 무엇인지 알려주면서 내가 원하는 정보만 추려놓은 웹사이트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옆자리 놔두고 수시로 펼쳐볼 수 있는 책 형태가 더 적합했다.


아들에게 말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행여나 엄마가 치매에 걸린다면 이런 책 사다가 보여달라고.



그런데...


쇼핑 사이트가 날 그냥 보내려 하지 않았다. 원하는 상품을 검색하고 장바구니에 담은 뒤에도 관련 상품을 줄줄이 내놓는 것이 인터넷 쇼핑의 마법 아닌가. 


알츠하이머와 치매 환자용 책에 관심 있다고? 

그럼, 이런 책도 있으니 참조해 보라고. 

너네 할머니는 꽃 안 좋아하시잖아!





결국, 이 날 새가 들어간 책도 같이 샀다. 최소 주문량을 맞추려 한 노력이기도 하지만 꽃과 정원, 새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니 한꺼번에 공부해도 좋을 듯해서다.



"내가 병원에 입원해서 심심해하면 이런 거 선물해 줘요."


내가 사들고 간 책을 다시 돌려주며 A가 한 말이다.


당시 유행하던 성인용 컬러링북을 건넸더니 A가 약간 못마땅해하는 눈치다. 평소에도 내가 주는 선물이 마음에 안 들면 그 자리에서 반납하는 분이다. 자신은 물질적으로 풍족한 사람이라 뭐가 더 필요하겠나,라고도 했다. 그런데, 이 날 반응은 여느 때와 달랐다. 


이때도 꽃을 주제로 하는 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생각해 보니, 60대 초반으로 아직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에게 쇠약한 노인과 환자에게나 어울릴 법한 책을 골라주었다, A가 여긴 건 아닐까 싶다.




책을 두 권이나 주문하고도, 계속해서 동물과 풍경, 아기 사진까지 둘러보고 있으니 옆에서 남편이 한 마디 거든다.



"그러다가 야채 사진책도 사는 거 아냐?"



커버 이미지: Photo by Annie Sprat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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