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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Apr 23. 2023

영국에서는 집 고를 때 이런 걸 본다고요?

"방 3개에 정원, 차고도 있고 최근 리모델링한 주택이 XXX 파운드인데, 관심 있나요?


부동산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한글로는 위 문장처럼 단순하게 옮겨 놓았지만 직원이 한 말에는 Gorgeous, Fabulous, Stunning이라는 수식어가 골고루 섞여 있었다. 하지만, 굳이 왜 그런 표현을 하나 싶을 정도로 실물은 실망스러웠다. 오히려, 이런 단어가 붙으면 '그냥저냥 살만한 집'이요, 수식어가 없으면 '무언가 부족한 집'이라 인식될 정도다.


처음에는 이 '기막히게 멋진 집'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또 연락해 준 직원의 정성을 생각해서 곧바로 집 보기 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점차 이런 전화에 시큰둥해졌다.


연락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쏟아진다는 점도 나의 냉담한 반응에 한몫했다. 100개 정도의 매물을 보고 살 집을 결정하자, 는 약간 황당한 목표를 정한 뒤 여러 사무소에 연락했으니 어쩌면 내가 자처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부동산사무소의 연락이 달갑지 않았던 더 큰 이유는, 이들이 전하는 내용을 조금만 분석해 봐도 혹은 실물을 보더라도... 



"아... 부동산사무소 직원과 나는 서로 동상이몽의 관계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어서다.


우리가 제시한 집의 요건 중 일부만 충족하고 나머지는 전혀 들어맞지 않음에도 예의 '기막히게 멋진 집'이라는 찬사를 쏟아내곤 했다. 


방 3개

시내에서 2-3km 떨어진 거리

거실에 카펫이 안 깔린 곳


이 3가지가 당시 우리 가족의 요구사항이었다. 부동산사무소에서도 당황할 정도로 너무 단순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이 간단한 조건마저 충족시키지 못하는 집을 소개해주니 나보고 어쩌라고. 



"정원도 넓고 정원 창고와 주차 공간까지 갖춘 집입니다."


얼핏 들으면 합격점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직접 가봤더니 거실에 이어 욕실에까지 카펫이 깔려 있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들은 물론 한국식 샤워 문화에 익숙한 남편까지 욕조 바깥으로 물을 흘려대는 통에 늘 바닥이 젖는 공간에 카펫이라니. 그런 집에 살면서 정원이 크고 또 그 정원에 창고가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러니 수시로 보내주는 직원의 정보를 신뢰해야 할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부동산사무소가 제안하는 집과 우리 가족의 기대사항이 자꾸 어긋나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풍수를 따지는 남편 때문이다.



"이 집은 남동쪽, 아니지, 남서쪽을 향하고 있네요."


남편이 나침반을 요리조리 돌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빌고 있었다. 우리에게 집을 보여주기 위해 파견된 직원이 신기하다는 듯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편은 집 고르는 기준으로 '남향집'을 강조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나침반을 이용하든 도면을 참조하든, 진정한 남향집을 찾기 힘들어서다. 


영국인도 풍수 개념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는 있으며, 건물 방향이 난방과 채광, 통풍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도 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남향을 선호하는 것도 아니요, 모든 집이 남쪽만 향하게 짓기도 힘들다. 무엇보다, 영국인이 말하는 집 방향은 한국에서의 의미와 다르다. 


아파트보다는 단독이나 연립 형태의 주택이 많은 영국에서 집 방향은 다방면에 영향을 미친다.


rightmove.co.uk


↑ 부동산 포털 사이트에서 발견한 집 매매 광고다. 


남향임을 광고해 놓았지만, 한국식으로 따지면 이 집은 북향이다. 집 입구가 아닌 정원이 남향이라는 말이다. 


영국식으로 지은 집의 입구가 남향이라고 가정해 보자.


대문을 열었을 때 나오는 거실과 그 거실 바로 위에 위치한 2층 침실이 남향 혜택을 받는다. 그렇게 되면, 거실 반대편에 있는 정원은 북향이 되는 셈이다. 영국에서는 해를 많이 받아야 하는 공간이 침실이나 거실이 아닌 정원이라고 본다. 이 때문에 위 광고처럼 '남향 정원'임을 강조하는 집은 있어도, 한국식 '남향집'을 자랑하는 경우는 없다.


참고로, 위 두 번째 사진은 왼쪽 집의 도면이다. 방위 표시가 거꾸로 되어 있다. 집 입구를 기준으로 도면을 파악할 수 있도록 이렇게 해놓은 듯하다.



또 다른 의미에서 '남향'을 따지는 경우도 있다.


inews.co.uk


↑ 태양열판을 설치하기 위해서다.


난방비 상승으로 태양열판 설치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는 기사에서 가져온 사진이다. 집 방향을 직접 알아낼 수는 없지만, 태양열판이 부착된 위치로 보건대 모두 남향이거나 남향에 가까울 것이다. 하루 중 해를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남쪽이 태양열판 설치에 적합하니까. 



남향은 아니지만, 다른 의미에서 집 방향을 중요시하는 부동산 광고가 또 있다.


rightmove.co.uk


↑ 동서남북의 방향이 아닌 바다 방향을 강조하는 집이다. 


오른쪽 사진은 이 집 정원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이런 황홀한 풍경을 매일 감상할 수 있는 집에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집 관리는 약간 까다로울 수 있다. 사계절 내내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오니 정원에는 해풍과 염분에 강한 식물만 버틸 수 있고 집 구조물도 일부 파손될 염려가 있어서다.



영국인도 집 방향을 신경 쓰지만, 주변 환경 특성상 집의 방향을 모두 일정하게 지을 수는 없다.


google.co.uk/maps


↑ 영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주택 밀집 지역이다.


집들이 일렬로 죽 늘어서다가도 학교와 놀이터, 공원, 축구장, 도로 등 주변 시설에 공간을 양보하면서 대열이 끊어지고, 또다시 이어지곤 한다. 그러다 보니 곳곳에 각기 다른 형태의 군집을 형성한다. 이렇게 여러 형태로 대열을 이루는 주택가에서 특정 방향의 집만을 짓기는 힘들지 않겠나. 



"벽 두께를 측정하려고 그러는데 이 창문 열어도 되나요?"


줄자와 이름 모를 기기까지 들고 와서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메모를 하던 심사원이 내게 한 말이다.


집을 팔려고 내놓았더니 EPC 인증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심사를 받던 중이다. 한국에 '건축물에너지효율등급'이 있듯, 영국에는 EPC (에너지효율증서)가 있다.


* EPC (Energy Performance Certificates)


한국의 개인 주택은 '건축물에너지효율등급' 인증 의무 대상이 아닌 반면, 영국에서는 개인이 보유한 주택도 EPC를 받아야 매매 및 임대가 가능하다. 덕분에 집을 고르는 사람에게 유용한 정보가 제공된다. 영국식 주택은 아파트에 비해 집도 크고 창문이 많은 데다 다른 집과 떨어져 있기에 주택 구조와 유지보수 상태에 따라 냉난방비가 크게 차이 날 수 있다. 집을 고를 때 에너지 효율을 따져야 하는 이유다. 지은 지 오래되고 이중창이나 단열재마저 없다면 에너지 효율은 낮을 수밖에 없다. 


which.co.uk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커튼을 열었더니 맞은편 창문을 통해 이웃집 남자의 형체가 보인다. 나는 슬그머니 다시 커튼을 닫았다. 


우리 집과 거의 동일한 구조지만 반시계 방향으로 90도가량 돌아앉은 집이라, 욕실 창문이 우리 집 안방으로 향해 있다. 이 집 고양이는 정원 담장에다 사람처럼 앞발을 걸치고 앉아 매시간 우리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내가 예뻐하며 곁으로 오라고 아무리 손짓해도 꼼짝도 안 하는 새침한 녀석이다.


서로 돌아가며 감시하는 이웃인 셈이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개미굴 형태로 들어선 집들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뻗은 도로에는 어떤 차량도 과속할 수 없고 외부인 출입도 적다. 주택가로는 최적이다 싶다. 엉뚱방향으로 이웃집과 맞붙어 원하지 않게 서로 감시하며 사는 불편함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만. 


집의 방향과 에너지 효율, 동네 분위기까지 영국에서 고를 신중해야 하는 이유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Brie Odom-Mabey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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