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TV를 보며 펑펑 울던 날

by 정숙진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의 일이다.


아들이 거실에서 색연필과 종이를 가져다 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나는 부엌에 서서 얼핏 살펴보느라 처음에는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종이에 붉은색과 파란색이 어우러져 동그라미 비슷한 형체가 생겨나고 모서리에 검은색 띠도 몇 개씩 더해지고 있었다. 초등학생의 서툰 손놀림이라 삐뚤빼뚤하긴 하지만 서서히 드러나는 색채와 형태로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태극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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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은 건곤감리의 각 문양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니 모든 걸 세 개의 검은 띠로만 표현하였다. 또한, 경기장 깃대에서 세로로 휘날리는 형태로 봐서인지 태극기를 가로가 아닌 세로 방향으로 그렸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면, 아마도 나의 유년시절처럼, 수업 시간에 태극기 그리는 시간을 가졌겠지만, 영국에서 나고 자랐으니 아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전혀 없었다. 태극기만 배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유니언잭도 잉글랜드 국기도 그리는 수업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집에서 태극기를 가르친 것도 아니다.


당시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축구 카드 모으기를 아들이 적극 참여하던 시절이다. 열 장씩 혹은 다섯 장씩 카드가 무작위로 담겨 있는 팩을 용돈을 모아 구매하곤 했다. 어느 선수 카드가 들어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구매하는 셈이다. 친구들끼리 카드 교환을 하는 날이 되면 학교에서 유일한 한국인인 아들에게 한국 선수 카드가 몰렸다고 한다.


카드에 각 선수의 출신 국가의 국기가 나오는데 태극기도 아마 그런 식으로 익숙해졌으리라.



"오늘 아이들끼리 놀다가 국기 그리기를 했는데, XX이가 이걸 그렸어요."


조이 집에서 놀고 있던 아들을 데리러 갔더니 조이의 할머니가 도화지 한 장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태극 문양의 붉은색과 파란색 위치가 바뀌긴 했지만 어쨌든 태극기다. 처음에는, 조이 할머니가 태극기 그림을 어딘가에서 구해 아들에게 보여줬겠거니 짐작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들이 스스로 그리더란다.


그 후 몇 년이나 지난 이날, 국기 그리기 시간도 아닌데, 아들이 집에서 태극기를 그린 이유는?



"곧 경기 시작하니까, 소파에 앉아서 보자."


2014년 2월이니 러시아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리던 때다.


평소 스포츠 중계를 즐기지 않는 편인 내가 올림픽이라고 해서 딱히 더 관심 가질 만한 종목은 별로 없었다. 그저 주변 사람이 보니까 한자리에 모여 보는 정도였다.


하지만, 여자 피겨스케이팅이 열리는 날이었다. 나는 기술 점수니 구성 점수니 그런 것도 모르고 쇼트, 프리도 구별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채점 기준을 모르니 오히려 신경 쓰지 않고 볼 수 있는 종목인지도 모른다. 스포츠 경기가 아니라 예술 공연으로 대했을 수도 있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두고 경쟁하는 순간이니 당연히 봐야 할 것 같았다.


영국 시각으로는 오후였던 걸로 기억한다. 남편은 회사에 있고 아들은 집에 있었으니 수업을 마친 시간이거나 시기적으로 보면 방학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건, 아들과 둘이서 편하게 생중계로 볼 수 있었다.


한국의 운동선수를 잘 알지 못함에도 아들은 김연아의 명성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날 경기에 큰 기대를 걸었으리라. 당연히 한국 선수가 금메달을 따리라는 확신에 차서, 태극기까지 직접 그려놓고 응원할 정도였으니.



"정말 멋진 동작이군요"


김연아의 경기를 중계하던 BBC 해설자의 말이다.


김연아를 보며 감동한 건 나뿐만 아니었으리라. 그저 아름답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홀려서 보고 있는데, 해설자도 할 말을 잃고 김연아의 마법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막상 경기가 끝나고 점수가 나오자 더욱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진행자 모두 김연아의 탁월한 기량을 칭송했지만, 남자 해설자가 우려의 말을 꺼냈다. '어쩐지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따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라고.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앞서 경기를 치른 아델리나 소트니코바가 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점수를 받아 놓은 상태에서, 마지막 차례로 김연아가 나온 것이다. 누가 봐도 개최국 텃새부리기가 뻔히 드러나지 않겠나.


아들은 김연아의 금메달을 확신하며 경기 내내 아까 사진에서처럼 태극기를 손에 펼쳐든 자세로 보다가, 마지막에 어이없는 판정 결과를 보고는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아이에게 뭐라 설명해야 할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나도 같이 울었다.


망할 심판들.


커버 이미지: Photo by Pavel Danilyuk on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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