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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Feb 16. 2024

나는 영국에서 태어났거든

그래서 뭐 어쩌라고?

바에 들어서자마자 요란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밤 8시.

모임이 열리는 시간이다. 


식당과 술집, 나이트클럽이 밀집한 이곳 거리에 주차 제한이 풀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차를 가져오는 사람, 일마치고 오거나 가족을 챙겨야 하는 이들 모두에게 편리한 시간임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주최 측에서 장소 전체를 빌린 건 아니기에 우리 모임과는 무관한 다른 손님들로 이미 내부가 붐비고 있었다. 다행히 모임 장소는 춤판이 벌어진 1층이 아닌 2층이라고 했다. 


코로나 이후 모임 참석자가 부쩍 줄어든 편이기도 하지만 12월 말부터 시작하여 2주가량 이어지는 긴 휴가를 보내고 난 뒤다. 다들 학교와 직장, 일상으로 복귀한 뒤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 모임 통보가 왔다. 하필, 한파까지 불어닥쳤으니 이런 때 열리는 모임의 참석자가 평소보다 많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어쨌든 내게는 딱 좋은 규모였다. 20여 명의 사람들과 거의 모두 돌아가며 인사를 나누고 다양한 주제로 대화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니. 



"나는 영국에서 태어났거든"


사회복지사로 일한다는 K의 말이다.


밤 10시가 되면 디제이가 들어서고 요란한 음악과 현란한 조명이 어우러진 나이트클럽으로 탈바꿈하지만 그전까지는 창고 같은 공간에서다. 조명마저 반쯤 꺼진 삭막한 분위기와 낯선 이들 사이에 끼인 어색함을 조금씩 떨쳐내고 한 명씩 돌아가며 인사를 나누던 중 대열의 중간 즈음에서 K를 만났다. 


먼저 어느 나라 출신이냐고 내게 묻길래 한국인이라고 답한 뒤, 나도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 그랬더니, 상대가 잠시 뚱한 표정을 짓고는 앞서와 같이 답했다.


흠...


내게는 당연하다는 듯 국적을 물어놓고서, 그 동일한 질문에 기분 나쁘게 반응하는 이유가 뭐지?

나더러 자기 얼굴만 보고 출신 국가를 파악하라는 소린가? 

'영국에서 태어났다'는 말이 대답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영국에서 태어났다고 영국인 되는 거 아니잖아?"


이렇게 대꾸하고 싶었지만, K가 곤란해할까 싶어 관두었다. 


자신의 출신 국가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는 사람을 간혹 만난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정체성을 몰라주는 나의 무지를 탓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유에서든, 나는 대화를 곤란한 방향으로 이끌지 않기 위해 국적에 대한 질문을 되도록 하지 않는다. 상대가 자연스럽게 화제로 삼는다면 모를까.


속인주의 원칙에 따라, 영국에서 출생한 아이는 부모의 국적을 따르게 하므로 영국에서 태어났다는 답변은 국적에 대한 정보가 되지 못한다. 


아마도 K는 "나는 영국 국적을 가진 부모로부터 영국에서 태어났으므로 영국인이야."라는 뜻으로 말한 것일지 모른다. 


아니면 혹시...


영국이 속인주의 원칙을 따르는 국가라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닐까?

'잉글랜드에서 스코틀랜드로 여행할 때, 여권이 필요할까요?'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하는 영국인도 있을 정도니, 속인주의고 뭐고 알지 못할 수도 있다.


나처럼 누가 봐도 외국인이구나 판단될 정도로 이국적 외모는 아니지만 K 또한 순수 영국인으로 보기 힘든 면모가 있었다. 남미나 다른 유럽 국가 출신일 수도 있고 혼혈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딱 꼬집어 말하기 힘들었다. 


초면에 상대의 국적을 물어보는 건 실례가 될 수 있지만, 우리 모임만큼은 그런 물음이 금기시될 이유가 없었다. 



"그쪽은 어느 나라 출신인데요?"


우리 모임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이다.


영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끼리 어울리는 사교 모임이니 당연하지 않겠나. 나는 애초에 이 모임의 외국인 비율이 100% 일거라 짐작했는데, 소수이긴 하지만 외국어를 전공했거나 낯선 사람과의 모임을 즐기는 영국인이 종종 얼굴을 내밀곤 했다. 


경험상, 프랑스와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등 다양한 유럽 국가 출신 사이에 영국인이 끼어 있을 때 단번에 이들이 영국인임을 알아차리기는 힘들었다. 더군다나, 이국적 외모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영국인인데 국적을 물어보냐는 식으로 반응하는 K도 있지 않은가.


매달 열리는 모임이지만, 나처럼 간헐적으로만 참석하는 사람도 제법 있으므로, 대다수의 참석자가 낯선 얼굴이라 할 수 있다. 함께 온 친구 2명과 모임 회장을 제외하면 내게도 대부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모임이요, 인사 나누는 사람마다 낯선 얼굴이라면, 국적에 대해 물어보는 건 당연한 행위 아닌가?  



"K는 자기 부모가 인도 출신인데, 왜 그렇게 답하는 건지..."


모임이 끝나고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K와 내가 나누는 대화를 옆에서 들은 모양이다. 순수 영국인은 아닐 것 같다는 K에 대한 내 추측이 틀리지 않은 셈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도인에 비해 피부색이 밝고 영어 발음도 영국식에 가깝지만, 그렇다 해도 순수 영국인과는 다른 외모의 K는, 왜 부모가 인도 출신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이국적 외모가 사람들의 궁금증을 유발하리라는 사실을 본인도 알지 않을까?


출신 국가에 대해 어설픈 답변을 하는 사람을 이전에도 종종 보아왔기에 나는 더 이상 K의 사연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내 궁금증이 솟아올랐다.


과연 내 아들은 같은 상황에서 어떤 답변을 할까?

K의 출생과 성장 배경이 내 아들과 비슷하지 않겠나?

외국인 부모로부터 영국에서 태어났다가 나중에 부모와 함께 영국 시민권자가 된 아들 말이다.



"사람들이 너에게 어느 나라 출신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니?"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는 도중 아들에게 물어봤다. 


겉으로는 덤덤한 듯 나왔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전날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묻고 싶을 정도로 간절했지만, 밤 12시가 넘어 온 가족이 잠들 시간이었다.


아들에게 한 번도 이런 질문을 해본 적 없고, 모국에 대한 아들의 태도도 생각해 본 적 없어서다. 곧 대학에 입학해 집을 떠날 시기가 다가오는 아이다. 국적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성장할 수밖에 없는 아들이 이제 와서 뭐라 생각하고 행동하든 부모인 내가 간섭할 시기는 이미 지났을 수도 있다. 


해외에 사는 한국인 중에는, 자녀가 한국어를 배우려 하지 않고 출신 국가마저 숨기려 한다고 토로하는 이가 간혹 있다. 현지 언어와 현지 문화에 더 익숙해지고 현지인을 친구로 삼으면서 자신이 한때 한국인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 채 산다고 한다. 얼마 전 내가 만났던 K처럼 말이다.


내 아들은 어떨까?


"나는 영국인이고, 한국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말해요."


아들은 별 고민 없이 곧바로 답했다.

다행이다 (다행인 거지?)


커버 이미지: Photo by Antenn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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