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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Mar 01. 2024

남편과 다정하게 다니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큭큭... 히히... 흐흐... &(@#((^$)..."


동네를 산책하는 중이었다. 


옆에 있던 일행들이 뭐라 중얼거리더니 킥킥대며 웃기 시작했다. 대놓고 크게 웃는 정도는 아니고 주변 사람에게 들키지 않는 선에서 겨우 참아가며 웃는 그런 웃음이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들이 웃는 이유를 찾으려 했으나 허사였다. 눈앞에 보이는 거라고는 우리보다 앞서 천천히 걷고 있는 노부부 한 쌍뿐이었다. 평소에도 조용한 주택가에서 다들 직장과 학교로 떠나고도 남을 시간에 킥킥거리며 웃을 일이 뭐가 있을까?


담벼락에서 우스꽝스러운 낙서라도 발견했나? 

누군가 집안에서 옷을 벗고 난리부르스라도 쳤나?


어느 경우든 나만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니 당황스러웠다. 30대 중반의 아줌마와 20대 초반의 대학생들, 그것도 영국에 첫 발을 디딘 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다르겠지만.


십여 년 전 친척 동생과 그의 친구들이 과제 수행 차 영국에 왔을 때다. 


유럽 주요 도시에 위치한 산업체를 방문하고 주변 지역까지 둘러보는 과제였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해 줄 일은 숙박을 제공하고 이들이 런던으로 견학 겸 여행을 잘 다녀오도록 도와주는 정도였다.  


당시 내가 살던 지역은 이렇다 할 산업체가 없는 소도시라 이들의 산업 현장 방문에는 도움이 안 되지만, 영국인의 일상을 보고 싶다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 함께 집을 나섰다. 집 근처 공원과 도서관도 구경시켜 주고 다른 공공시설도 하나씩 눈에 띄는 대로 둘러본 뒤, 전형적인 영국식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는 걸로 영국 문화 탐방을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집을 나서자마자 이렇게 웃음보가 터진 학생들 때문에 이유도 모른 채 곤란을 겪게 되었다.


"야, 뭘 보고 웃는 거야?"


친척 동생을 나무라듯 따져 물었다.


나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웃음은 사그라들지 않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학생들의 시선은 우리 바로 앞에 머물고 있었다. 앞서 가는 노인에게로 말이다. 이들이 뭘 잘못했길래?




"다 늙은 노인네들끼리 손잡고 다니니까 웃기잖아요, 누나!"




뭐라고???

이런...&*&^^%)@!



이 철없는 것의 머리를 쥐어박을까 하다, 예의 바른 동생의 품행을 알기에 참기로 했다. 한국에서 보지 못하던 풍경이라니 어쩔 수 있겠나. 내게는 지극히 정상적이라 여겼던 행동이 학생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되었나 보다. 


젊은 커플이었다면 이런 반응을 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다 같은 커플인데 젊은 사람은 되고 나이 든 사람은 안 된단 말인가?


그럼...

나이는 젊다 해도 부부 사이에 손잡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봐줄까? 


박찬호가 LA다저스에서 활약할 무렵 같은 구단에서 뛰던 노모 히데오의 사진이 미국에서 화제가 된 적 있다. 무슨 시상식인가, 부부가 함께 참석한 자리인데 남녀가 멀뚱히 떨어져 있어서다. 친구인 박찬호가 나서서 일본의 문화를 해명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래도 유명인의 사생활을 파헤치기 좋아하는 미국 언론이 두 부부가 파경을 맞았느니 뭐라니 하며 얼마나 소란을 피웠겠나.


한국이나 일본이나 부부가 거리를 두는 풍습은 유사한가 보다.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한국의 풍경에도, 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기껏해야 30대 초반이었을 우리 부모 세대조차 부부끼리 손잡는 행위는 보기 드물었다. 그 후로 내가 성인이 되어 바라본 한국 풍경에는 조금씩 세대 차이를 보이긴 했는데, 그보다 세월이 더 흐른 지금은 어떤지...



"아니 이거 뭐야? 이러면 안 되지!"


행사를 마치고 가족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하던 중 A 가족과 마주쳤다. 이틀간 진행된 행사에 같이 참석했던 이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귀가하는 중이었다.


두 가족 모두 같은 방향으로 향하던 참이라 자연스럽게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A가 갑자기 나를 위아래로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곁으로 다가와 내 손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내 손을 잡고 있던 남편의 손마저 덩달아 딸려갔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부부끼리 손을 잡고 다니다니, 이게 말이 돼?"


나이로 따지면 내가 더 어리긴 하지만 (그렇게 보였지만), 평소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도 아니고 바로 전날 처음 만난 사람이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애매하게 나오는 데다 손까지 낚아채다니. 심지어 남편과 내가 잡은 손을 억지로 떼놓으려 고집까지 피웠다. 아무리 장난이라 해도 지나치다 싶었다.


국적 불문하고 참가자가 수백 명에 달하는 대규모 행사에 가면 으레 이런 무례한 사람을 한두 명씩 만나곤 하다 보니 나도 단련되었나 보다. 이 정도 공격이라면 정색하고 반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부부끼리 손도 안 잡고 다니세요? 정말요? 왜요?" 


나는 도리어 A가 이상하다는 투로 받아쳤다. 겉으로는 영화 <슈렉>에 나오는 장화신은 고양이처럼 애절한 표정과 상냥한 목소리로 치장한 채. 


표정과 목소리야 어떻든, 당돌한 내 되물음에 무안해진 A는 그제야 누그러진 태도로 나왔다. '영국의 노인들이 손잡고 다니는 거 보면 부럽긴 해요'라고까지 했으니 누그러짐 정도가 아니라 완전 태세 전환이다.


영국인이 하면 부럽고 한국인이 하면 부끄러운 행위인가?

부러우면 자기도 시도하면 될 일 아닌가?


세상의 모든 부부가 다정하게 지내야 할 의무는 없다고 본다. 자식 때문에 혹은 주변 눈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부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도 있으리라. 또한,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타인에게 억지로 드러내며 사는 쇼윈도 부부도 있겠지. 그런 부부를 탓하거나 비난할 이유는 없다. 마찬가지로, 사이가 서먹해진 남녀에게 억지로 손을 잡게 하거나 애정 표현을 강요할 필요도 없다. 각자 자기 모습대로 살면 되는 일 아닌가. 


평소 같으면 절대 내뱉지 않을 테지만 상대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반격하기 위해 말을 꺼낸 김에, A의 남편과 그 아들에까지 물었더니 아무런 답변을 못한다. 나름 사정이 있겠지. 


손을 잡고 다니든...

팔짱을 끼고 다니든...

모르는 사람처럼 따로 떨어져 다니든...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될까? 부부 사이의 일에 왜 그토록 간섭하려 들까?



"너무 잘 챙기려 하지 마. 나이 들면 알겠지만, 남편이 싫어지게 마련이야."


늦은 시간까지 학회 일에 몰두하는 남편을 걱정했더니 B가 이렇게 대꾸했다. 


남편을 원수 취급하는 여성을 주변에서 간혹 보곤 한다. 결혼한 뒤 부부 관계가 소원해지는 현상은 동서고금 어디에나 있고, 이유도 다양하겠지만 해외에 사는 사람은 조금 다른 핑계를 대곤 한다. 남편은 기러기 아빠로 한국에 내버려 두고 아이들 하고만 영국에 와서 살고 싶다고도 하고, 남편이 주재원 임무를 마치고 복귀한다면 남편만 보내고 가족은 영국에 남겠다고도 한다.


대부분 현실에서 실천하기 힘든 꿈에 불과하다. 영국의 엄격한 비자 규정이 버티고 있기에. 


자녀의 조기 유학을 위한 선택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부부가 떨어져 살아야 하는 이유를 강조하며 남편을 원수 취급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태도는 참기 힘들다. 그 예전 B가 말했던 '나이'에 이르고도 그때 들었던 말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아내가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는 모습을 탓할 이유는 무어란 말인가? 


"더 늦기 전에 출산해야 한다"

"이제 둘째 (딸)도 낳아야지"


40대에 접어들면서 이전에 숱하게 듣던 이런 잔소리로부터 해방되나 싶었는데 새로운 잔소리가 시작된 것 같다. 


육아를 하느라 남편과 나 사이에 항상 어린 아들을 끼고 다녔는데, 이제 아들이 나이가 들면서 부모와 동등하게, 또 조금 거리를 두고 걸으면서 자연스레 시작된 우리 부부의 손잡는 행위, 나이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하고 싶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micheile henders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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