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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Mar 15. 2024

그러면 주변에서 꼭 말 나오잖아요

"계좌번호 좀 알려주세요"


A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의 시아버지상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친분만 놓고 따지면 이런 상황에서 남편끼리 연락하는 편이 적합하다 싶었지만, 누가 어떤 식으로 소식을 듣고 또 어떻게 연락하든 경조사에 신경 써준 마음이 고마웠다.


아무리 그래도, 이미 장례식이 끝난 뒤라 돈을 받는 건 도리가 아니다 싶어 A의 뜻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무엇보다, 남편과 나 누구도 A 가족의 경조사에 참여한 적 없고 어떤 일조도 한 적 없기에 더더욱 돈을 받을 수 없었다. 


계속 돈 이야기가 나올까 두려워 나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오랜만에 연락한 터라 A 가족 소식이 궁금해서 이런저런 질문도 하고 말을 이어가다 보니 A 부부가 한국의 친척 경조사에 제대로 참석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특히, 몇 해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A의 남편이 크게 상심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해외에 사는 사람 중 고국에 있는 부모의 임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그런데, A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그러면 주변에서 꼭 말 나오잖아요" 


타국에 사느라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해 혹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 슬퍼하는 남편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주변에 나쁜 소문이 돌까 두렵다고? 


A의 '말' 이야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우리 부부 또한 부모 임종을 지키지 못했음을 시인해 버렸는데, 그러자 A는 당연하다는 듯 '그러면 주변에서 꼭 말 나오잖아요'를 한 차례 더 외쳤다. 


'XXX'라는 메시지가 입력되면 'OOO'라고 자동 답변하도록 설정해 놓은 챗봇과의 대화 느낌이었다. '니 개인 사정이야 어떻든 나는 이렇게밖에 답변 못해'라고 시인하는 것처럼. 


'임종'이나 '불효자', '경조사', 이런 단어가 뜨면 자동으로 답변하도록 뇌가 기억하는 건가? 그럴 만한 단어는 더 있겠지. '용돈'이나 '제사', '명절', '안부 전화', '선물' 등등.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남편이 비행 편을 이용하여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다시 지방으로 가는 교통편으로 장례식장에 도달하기까지 24시간가량 걸렸다. 그런데, 이건 소식을 확인한 순간부터 해당한다. 영국과 한국 간 시차가 있기에 부고가 전해진 시간과 이를 확인한 순간의 격차를 따지면 더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한국의 장례식이 대부분 3일장으로 치러진다고 하는데 남편이 도착할 때까지 발인 시간을 최대한 끌긴 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한국의 장례 문화에서 기대하는 상주 역할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사람의 힘으로 조절할 수 있는 장례식에도 지각하는 판에 사람 뜻대로 할 수 없는 부모의 임종은 어떻겠는가.


며느리인 나는 장례식에 가보지도 못했다.


아들은 수술을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회복기를 거치고 있었다. 대수술은 아니었기에 퇴원 후 학교로 복귀하는 등 이전 생활로 돌아가려 노력 중이었지만, 이건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고집을 부려 시작한 일이다. 20시간 이상 소요될 교통편 이용과 장례식 참여까지 버틸 몸 상태는 아니기에 내가 막아섰다. 


문상객이 수시로 물어대는 '가족은 어떻게 하고?'라는 질문에 아마 남편은 수십, 수백 번씩 아들의 사정을 반복해 말했으리라. 이런 우리 결정을 두고 남이 말을 한다면 어쩔 수 없다.



"저는 그런 말 신경 안 써요. 그 사람들이 제 인생 살아 줄 것도 아니잖아요."


이렇게 답하며 A의 말을 슬쩍 잘라버렸다.


처음 통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 소식을 듣고 신경 써 주는 듯한 A의 마음씨에 감동했지만, 점차 챗봇 메시지 창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대화에 질려버려서다. 오히려 인간미 없는 챗봇보다 더 냉정하고 두렵게 다가왔다. 


만날 때마다 묻지도 않은 사람들의 근황을 줄줄이 들려주곤 하던 사람이다. 정작 A 자신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영숙이 엄마와 동철이 엄마가 서로 신경전 벌이며 싸우는 통에 거기 끼어서 새우등 터졌잖아요."

"선희 언니는 시도 때도 없이 날 부려먹지, 희정 언니는 맨날 잔소리하지, 미치는 줄 알았어요."

"상혁씨가 장학금 먹튀하고 한국 들어간 거 들었어요?"


A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의 반 이상은 내가 모르는 이들이었다. 얼굴은 아는데 이름을 모를 수도 있고, 이름은 아는데 누구의 엄마, 아빠로는 모를 수도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어쨌건 별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속속들이 늘어놓던 A다. 


이런 과거 발언이 하나씩 머릿속에 떠오르자, '그러면 주변에서 꼭 말 나오잖아요'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너에 관해 주변에 소문 퍼뜨리겠으니 각오하라'는 소리로. 




나와 내 남편은 물론 A 부부조차 피하기 힘든 딜레마가 있다. 


한국의 친척 경조사 참석과 노부모 보살핌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부모가 병환이 있으면 이들을 다른 가족에게 떠넘긴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하며, 임종을 지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서다. 


그런 사정을 알고도 '아무개가 부모 임종도 안 지킨 불효자식'이니, 뭐니 정말 뒷말을 한단 말인가? 

설령 그렇다 한들 그런 말에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상희를 두고 말 많았잖아."


대화 도중 B가 뜬금없이 꺼낸 말이다.


언제부턴가 상희가 나이 지긋한 여성을 대동하고 다니길래 친정어머니겠거니 짐작했는데, 산후도우미라고 했다. 한국의 친정어머니 대신 도우미를 고용해 영국에 파견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해외 파견 산후도우미 서비스는 고사하고 산후조리원마저 흔하지 않던 때다. 이런 때 영국까지 도우미를 파견해 준 친정이라고 하니 부럽긴 했다. 상희의 친정 재력을 어느 정도 알던 나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남편마저 의사다. 


그런데, 출산한 지 얼마 안 된 상희에 대해 무슨 일로 사람들이 말을 한단 말인가, 나는 그게 더 궁금했다. 더군다나 당사자 앞에서는 다들 살갑게 대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무슨 일로 말이 많았는데요?'라고 물었다.



"다른 아주머니들은 모두 한 푼이라도 아껴서 잘 살려고 하는데 산후도우미를 한국에서부터 불러와 돈을 펑펑 쓰면 되겠어?"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펑펑'이라는 말에는 혐오감마저 들었다.


타인의 손을 아예 안 빌린다면 모를까, 친정이나 시가 식구가 영국까지 와서 산모를 도와주는 가정도 있고 아내 혼자만 고국으로 돌아가 출산을 하고 오는 가정도 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인 산후도우미를 쓰는 방식이 가장 비싸겠지만, 가족이나 친척이 해도 돈이 드는 건 마찬가지다. 산후조리 문화가 거의 없다시피 한 영국에 살면서 어떻게든 한국식 문화를 따라가려면 부담이 되기 마련이다.


해외에 사는 딸을 위해 도우미를 파견해 줄 정도의 재력이 있는 친정에다 남편마저 의사인 사람이 주변 사람, 특히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해외유학생 가족의 눈치를 봐야 하나?


같이 쇼핑을 하러 가자는 제안에, 내게는 별 쓸모도 없는 물품이요 그럴 경제적 여유도 없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더니 '궁상맞게 살지 마라'며 경고하던 사람이 B다. 그의 눈에는 너무 잘 살아도 너무 못 살아도 안 되는 모양이다.


앞서 언급한 사람들 모두, 평소 내가 하는 말에는 시큰둥하게 반응하다가 약점이 조금이라도 드러난다 싶으면 어떻게든 파헤치려 했다. 기회만 되면 남의 뒷담화를 늘어놓는 행동도 마찬가지다. 내가 무심코 한 말이 누군가의 귀로 엉뚱하게 흘러 들어갈 것이 뻔했다. 묻지도 않은 주변 사람의 험담을 줄줄이 읊어내는 걸 보면 말이다. 


남의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도 없고, 나에 대해 떠들어 대는 사람의 말을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들을 경계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싶다.


* 글에 언급된 이름은 물론 이니셜까지 모두 가명이며, 소개된 각 일화도 약간씩 각색되었습니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saeed karim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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