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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Feb 09. 2024

'도를 아십니까?' 보다 더 당황했던 순간

하교 시간에 맞춰 아들을 데리러 가는 길이었다. 집 앞 골목을 막 벗어나려는데 맞은편에서 남성 두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앗, 저 사람들이 여길 왜...?"


둘 다 검정 양복바지와 하얀 셔츠, 명찰, 긴 끈이 달린 가죽 가방 차림이었다.


누가 봐도 M 종교 선교사들 아닌가.


종교에 대해 무지한 나는 M 종교인이라고 하면 무조건 미국인이요, 또 남성에다, 한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만 활동할 거라는 막연한 짐작을 하고 있었다. 


한국, 일본, 중국도 있는데 왜 영국땅에 이들이 나타났을까? 

10분 거리의 번화가를 놔두고 하필 왜 이 작은 동네를 택했을까? 

대로변에서 분주히 오가는 사람을 선교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인식의 대혼란을 겪었다. 


물론, 내가 아는 얄팍한 상식의 세계가 무너진다는 사실 말고는 딱히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내게는 종교인에 대한 거부감은 없어서다. 다만, 곧 수업을 마칠 아들을 데리러 가야 한다는 급선무가 있기에 이 낯선 사람들과의 조우가 꺼려졌을 뿐이다.


우리 동네는 도로가 구불구불하게 뻗어 있고 그 도로 사이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개미굴 형태로 집이 들어서 있다. 100호 정도 되는 이 동네 어느 집에서 나서든, 지금 내가 서있는 골목을 통과해야 큰길로 향할 수 있다. 도로 구조상 어떤 차량도 과속할 수 없고 방문 목적도 없이 외부인이 들어섰다가는 길을 잃기 십상이요 자칫 수상한 자로 의심받을 수 있다.


주택가로는 최적이다 싶지만, 이렇게 하나밖에 없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맞은편에서 무작위로 마주치는 사람과 강제로 인사를 나누어야 할 때가 있다. 뭐, 동네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이 선교사들은 인사만으로 끝나지 않을 듯했다.


'도를 아십니까’는 물론 예수님, 부처님에 이어 다단계까지... 믿음을 전파하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나의 신념과 상관없이 끝까지 듣게 되는 결과가 내게 발생했다. 


상대의 청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도 한몫하지만, 내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도 있고, 무엇보다, '당신이 뭐라고 꼬셔도 나는 안 넘어갈 거야'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작용했을지 모른다. 


격투기를 배웠기에 위급한 상황에서 호신술을 쓸 정도는 되는데, 그렇다고 남자와 맞짱 뜰 정도는 아니지만, 주로 여자가 권하는 믿음의 세계는 별 두려움 없이 한 번씩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나...

바쁜 이날만큼은 어떻게든 거절해야 했다. 

어떻게 거절하나...


고민... 

고민...

고민이었다.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복잡한 생각이 이어지는 사이 두 남성과 덜컥 마주쳤다.


앗...

이를 어쩌나...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이들은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듯한 태도다. 아예 나라는 존재는 관심도 없다는 듯 무심히 옆을 지나가버렸다. 둘 만의 대화 세계에 빠져서 말이다. 무슨 선교사가 그래?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두 남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사람의 두뇌는 사물을 보는 즉시 그 존재를 인식할 때도 있지만, 그 잔상을 기억해 두었다가 조금 더 늦게 인식할 때도 있다. 남자들과 맞닥뜨릴 무렵 이들의 가슴에 있던 명찰이 그제야 떠올랐다. 개인의 이름이 들어간 명찰이 아니라 익숙한 명칭이 들어간 로고였다. 청록색과 남색이 어우러져 셔츠 문양으로 박힌 로고. 집 근처에 있는 한 중등학교의 로고다.


당시 내가 마주친 사람은, 지금 대학준비반에 다니는 내 아들보다 더 어린 학생이었던 셈이다. 키가 커서 내가 성인 남성으로 오인했던 게지. 하필, 또래 학생들이 많이 쓰는 배낭 대신 긴 끈이 달린 가방을 들고서 말이다.


기상청에서 폭염 주의보를 내리는 날을 제외하고 - 영국에 그런 날이 연중 몇 차례 되려나 - 학생은 사계절 내내 교복 재킷을 착용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음을 아들이 중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물론, 교복 규정이 덜 까다로운 학교도 있지만. 내게 아무리 익숙한 교복이라도 셔츠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학생의 모습은 어쩌면 이날 처음 봤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초등학생도 수업을 마치지 않은 그 시간에 학교를 나선 중등학생은 뭐란 말이지? 괜히 주변 사람에게 혼란을 주고 말이야.


커버 이미지: Photo by Isaac Quick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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