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너머에서 누군가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선영이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상대의 목소리만큼은 익숙했다. 남편 회사 동료인 A였다. 더 정확히는, 남편이 속한 영국 사무소로 출장 나온 한국 사무소 직원이다.
상대의 정체는 알겠으나 그가 내게 전화한 경위가 이해되지 않았다.
남편과 A는 한국에서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지만, 나는 가족 모임에서 그를 두어 차례 만났을 뿐이다. 운동장에서 마이크 없이 연설을 해도 전교생에게 다 울려 퍼질 듯 목소리가 굵고 쩌렁쩌렁한 분이라 몇 번 만나지 않고도 그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기억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A 자신은 물론 그의 가족 누구에게도 내 전화번호를 알려 준 적 없는데 어떻게 내게 연락했을까? 남편이 줬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와 통화할 이유가 전혀 없다 싶은 이에게서 전화가 오니 당황스러움 그 자체였다.
이날 남편은 근교 도시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고자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퇴근을 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또 오랜만에 영국에서 재회했다 해도 같은 층에서 근무하지는 않으니, 일찌감치 회사를 나와 학회장으로 떠난 남편의 행보를 A가 몰랐던 모양이다.
남편의 오후 일정을 알려줬더니 A는 그제야 이해된다는 듯 웃음을 지었지만 여전히 서먹한 우리의 대화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지 망설이는 듯했다.
A가 남편 차를 얻어 타고 쇼핑을 가려했더니, 자리에도 없고 전화도 안 받더라는 소리다. 서로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라 이런 일로 차 태워달라는 부탁을 부담스러워할 이유는 없었다.
'그 치약은 영국에도 판매되는데요.'라고 지적하려다 꾹 참았다. 한국 영국 할 것 없이 다 유통되는 치약인데, 문제의 브랜드만 피하면 될 일 아닌가. 굳이 영국에서 치약을 사들고 가야 할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유해 성분이 들어간 치약이 판매되었다는 소식에 사회 전체가 분노와 우려로 혼란을 겪던 때다.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위해 무해한 치약을 구하려는 이의 마음은 알겠으나 영국이 특별히 소비자 천국도 아니고, 여기가 더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10분 거리에 있는 마트까지 차를 얻어 타고자 동료에게 연락을 수 차례 시도하고, 그래도 안 되니 한 번도 연락한 적 없는 그의 아내에게까지 손을 뻗을 정도로 위급한 사안인가? 누군가 차를 태워주지 않으면 혼자 마트에도 못 간단 말인가? 영국에서 주재원으로 몇 년씩 근무하던 사람이?
이 모든 질문을 머릿속에서 하나씩 꺼내 스스로 답을 찾고자 고민하는 사이 침묵이 이어졌다. 견디다 못한 A가 비장의 무기라도 되는 듯 한 마디 덧붙였다.
차라리 선영이 엄마가 시켰다 했으면 넘어가는 척이라도 해주지.
한국 지사에서 근무하는 A가 상대하는 '높은 사람'과 영국 본사에서 근무하는 남편이 상대하는 '높은 사람'은 서로 다르다. 누가 더 상위 계급이라는 말은 아니다.
A가 정의하는 높은 사람의 심기를 거슬렸다고 내 남편이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은 낮다. 그런 관계를 들먹일 정도로 A가 졸렬하거나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도 아니리라. 상사가 시킨 일이니 자신이 곤란해지지 않도록 신경 좀 써달라는 표현이겠지.
그 말을 듣고도 나는 대꾸할 거리를 찾지 못해 계속 침묵을 지키고만 있었다. A의 갑작스러운 전화만으로도 당황스러운데 그의 요구사항은 더욱 어처구니없어서다.
'학회에 갔다면 어쩔 수 없지요'라고 말끝을 흐리며, 또 그럼에도 못내 아쉽다는 듯한 투로 A가 전화를 끊으려 했다.
내가 어떤 식으로든 말은 해야 할 것 같아, 내키지는 않았지만, 남편이 집에 도착하면 말을 전하겠노라 했다.
전화를 끊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얼마 전 우리 가족과 함께 산행을 떠났던 B가 떠올랐다.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사람이다. 오랜만에 서로 연락도 하고 당일 일정과 산행 코스를 알려주기 위해 그에게 이메일을 보내면서 내 연락처도 따라간 모양이다.
같은 한국 사무소에서 동시에 출장을 나온 A와 B는 직급은 다르지만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 서로 팀을 이루어 근무했으리라. 내 남편에게 연락이 닿지 않는다 걱정하는 A를 위해 B가 내 연락처를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는 안 받기로 결심한 순간이다.
낯선 번호에 대한 거부감은 사실 A의 전화를 받기 전부터 있었다.
이토록 대놓고 요구하다니...
이러고도 보이스 피싱이라 할 수 있는가 싶어 허탈해하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상대가 발끈했다.
제법 당돌하게 받아치기까지 하는군.
PPI 관련 뉴스가 연일 보도되던 시절이다.
PPI (Payment Protection Insurance)
* 납입금 보호 보험
이름이 허술하더라도 이해해 주기 바란다. 한국에 유사한 상품이 없는 듯하여 내가 임의로 지었으니.
신용카드나 대출 상품을 이용할 때 가입하는 보험이라고 한다. 신용카드를 쓰다가 혹은 대출을 받았다가 개인 사정으로 돈을 갚지 못하는 경우 대신 갚아주는 보험이다.
이 상품의 보장 내역이 과장되었다는 결론이 내려지면서 이에 가입한 소비자에게 피해 보상을 하라는 판결이 났다. 금융 당국이 정한 기한 내에 피해 보상을 신청하라는 내용의 기사가 영국의 주요 뉴스에서 다루어졌다.
그런 상품에 가입한 적도 없고 돈을 잃은 적도 없으니 나와는 상관없겠거니 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보다. 당사자 모르게 보험에 가입되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신용카드를 사용하거나 대출받은 적 있다면 누구나 해당할 수 있다고.
"너도 모르게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잖아."
"보상금이 수천 파운드에 달할 수도 있다고."
"그대로 내버려 두면 너는 바보야."
뉴스에서 계속 이렇게만 떠들어 대는 듯했다.
맨날 PPI, PPI라고 외치지만... 사실 PPI가 무엇인지 이 정도까지 이해하는 데도 내게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불안하고 불편한 시기였다.
내가 피해를 입었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입었다면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나 같은 혼란을 겪는 소비자를 노리는 제2의 범죄가 생겨났다. 바로, 보이스 피싱이다.
"전체 신용카드 사용자 및 대출자 중 40% 이상이 PPI에 가입해 있으며, 피해자 중 90% 이상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저희는 금융 옴부즈만 산하 기관으로 PPI 피해 고객을 위해 보상 절차를 대행해 드립니다."
"고객님의 개인 정보를 알려주시면 피해 내역이 있는지 저희가 직접 조사한 후 보상 금액 100%를 입금해 드립니다."
대략 이런 식의 내용이 담긴 전화가 때때로 걸려왔다. 물론, 끝까지 듣지 않고 끊어버린 경우가 더 많았고, 나중에는 PPI라는 말만 튀어나와도 '관심 없다'며 대화를 중단했다.
듣는 순간 나도 이 보험에 가입했을지 모르니 시키는 대로 해볼까, 잠시 고민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피해자 구제 방안이 실제 존재한다 하더라도 철저히 개인 정보에 해당하는 은행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아무렇지 않게 요구하는 기관이 어디 있겠나? 그것도 PPI 피해 조사에 하등 도움 안 되는 정보를 말이다. 보이스 피싱이라 이름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로 허술한 속임수라 할 수밖에 없었다.
검찰을 사칭하며 그럴듯한 내용으로 개인 정보를 요구하거나 송금을 유도하고, 심지어 링크를 클릭하게끔 만들어 해킹을 하는 등 언론에서 숱하게 경고해 온 보이스 피싱 조직의 치밀한 수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지금껏 내가 겪은 보이스 피싱 수법이 허술하다 해서 미래에 더 진화된 방식으로 접근해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사기를 당하지 않으리라 자신할 수도 없다.
정말 필요한 이에게서 오는 전화는 놓치더라도 문자나 음성 메시지로 혹은 다른 수단을 통해 결국 내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이래저래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는 받지 않는 편이 낫겠다 결론 내렸다.
* 글에 언급된 이름은 물론 이니셜까지 모두 가명이며, 소개된 각 일화도 약간씩 각색되었습니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Ahmed Aqtai Pexels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