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 글을 새롭게 다듬어 올립니다 -
초등학생 자녀를 둔 A의 부탁이다.
가족과 함께 영국에 온 A는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의 높은 교육열을 모르는 바 아니나 약간 우려가 되었다. A의 아들은 9월에 시작하는 영국의 학기 제도 때문에 한국에서 보다 한 학년 높아졌다. 생일이 몇 개월 빠르다는 이유로, 한국의 또래보다 더 높은 수준의 교과 과정을 따라야 하는 셈이다.
학교와 학원을 통해 영어를 공부했다고는 하지만 영국 학교에서의 적응은 다른 문제다. 누구나 영국식 영어에 처음부터 쉽게 적응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문화도 다르다. 한국에서 타 도시로만 전학을 가더라도 사투리와 지역 내 특유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에서 소외감을 느끼곤 하지 않는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영국의 초등학교에서 수준별 교육을 한다는 점이다. 정기적으로 영어 책 읽기와 수학 문제 풀이를 통해 학생의 능력을 테스트해서 실력에 맞는 그룹에서 공부하도록 한다. 교과서도 없다. 그러니, 초등학교 5학년이라고 해서 반드시 5학년 수준에 맞는 책으로 학습할 필요가 없음을 A에게 설명했다. 지금 아이의 수준에 맞는 책을 고른 후 천천히 진도를 높여 가는 편이 낫겠다고 말이다.
내 설명을 듣는 듯하면서도 A는 결론적으로는 아이의 현재 학년에 맞추는 것만이 자신의 관심사이며 다른 말은 들을 필요 없다는 반응이었다.
독서를 통해 영어공부를 하고 싶다는 B의 말이다.
한국에서 워킹맘으로 바쁘게 지내던 B는 남편이 영국 지사에서 근무하는 동안 잠시 전업주부로 살게 되었다.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들마저 학교에 보내고 나면 최소 6시간의 자유가 주어진다. 결혼 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여유가 주어지니 이 틈에 영어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대화 도중 우연히 책이 주제로 나오자 B가 내게 영어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말이 나온 김에 곧바로 근처 도서관에 가서 B의 회원 카드부터 만들고 그 자리에서 책도 고르기로 했다.
영어공부를 그만둔 지 20년이 넘은 B의 영어 실력은 영국의 초등학생 수준이었다. 나는 절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B를 안심시킨 다음 영국의 초등학생이 주로 읽는 책을 골라줬다. B가 책을 펼치더니 몇 개 단어를 제외하고 어느 정도 읽을 만하다고 했다. 또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내용의 동화라 원문으로 읽는 재미도 있다며 반겼다. 하지만, 책을 대출해 가자는 내 제안에는 앞서와 같은 반응을 하며 망설이는 듯했다.
공부 삼아 읽기 딱 좋은 책이지만, 주변의 시선이 걱정되며 특히 초등학생 자녀가 자신을 보며 비웃을 것 같다고 우려했다. '다 큰 엄마가 자기들이랑 같은 수준의 책을 읽는다'라고 비웃으면 어떡하냐, 는 것이다.
부모가 영어를 잘할 때는 모를 수도 있지만, 영어를 못하는 경우 아이는 금방 눈치챈다. 담임선생님이나 주변 사람과의 대화에 엄마가 적극 참여하지 못함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차라리 '엄마도 너처럼 책 읽으며 공부하는 중이다'라고 떳떳이 밝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또, '엄마가 너희들 키우고 직장 다니느라 영어공부할 시간이 없었어'라고 그 이유도 설명하고.
외국에서의 생활이 처음이라면 아이 스스로도 알 것이다. 외국어 구사가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부모와 아이가 함께 도서관에서 책 고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엄마는 이 책 읽으려고 하는데, 너는 뭐 읽을래?"
"지난번 책 재미있었어? 엄마도 읽어볼까?"
부모의 이런 솔직한 태도가 오히려 자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무엇보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사람이 초등학생 수준의 책을 빌려 본다고 꼭 창피해야 할 일인가?
한국의 도서관에 들른 외국인 C를 상상해 보자.
그의 눈에 들어온 책은 알록달록한 그림과 큼직한 글자가 어우러진 동화책이다. C는 흡족해하며 <흥부와 놀부>, <구름빵>을 집어 들고 자리로 돌아와 읽기 시작한다.
성인이 동화책을 읽고 있다면? 그것도 외국인이라면?
성인과 외국인이라는 점에서 눈에 띄는 외모에다 동화책이라는 앙증맞은 존재 때문에, C의 책 읽는 모습은 어색하게 혹은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성인이 되어 수영을 배운 적 있는가?
수영장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발차기 연습만 지겹도록 하던 시절이 있는가?
물에 가라앉지 않으려 발버둥 치며 힘겹게 팔다리를 휘젓다 물을 연거푸 삼킨 시절이 있는가?
다른 선배 강습자들의 동작을 부러워한 적 있는가?
아마 이 무렵 배움을 중도 포기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나는 기초반에서도 실력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강사의 별도 지도까지 받아야 했다. 체대 출신인 남자 강사 못지않게 키가 큰 여성이 물밖에 나와 물속 동작을 되풀이 하는 건 상당히 민망한 일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일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온갖 고초가 따른다 하더라도 나처럼 꼭 배우겠다 결심한 사람은 끝까지 남아 결국 수영을 배운다.
책 읽기와 영어 공부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배움의 과정이 부끄럽다고 남에게 감추려 하거나 자신의 실력과 거리가 먼 책으로 시작하려면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
나 같으면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C의 노력이 가상해서 칭찬해주고 싶을 것 같다.
영국에 처음 오는 가족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대부분 자녀 교육과 영국에서의 생활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다. 상당히 혼란스럽고 두려운 시기를 한동안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들도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데 그럴 때면 자신의 영어 실력에 대해 걱정하는 말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래서 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어린 자녀를 둔 가정은 대부분 내가 권하지 않더라도 도서관 등록과 책 대출이나 책 구매를 스스로 척척해낸다. 이런 시기에 이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책에 대한 주제가 나오면 꼭 이런 질문을 한다.
내 나이에 어떤 책이 어울릴까?
내 지위에 어떤 책이 어울릴까?
우리 아이 학년에 어떤 책이 어울릴까?
내가 이런 책을 읽는다는 걸 남들이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요즘 초등학생들은 다 이 책 읽는다고 하던데 내 아이도 읽게 할까?
미안하지만, 이런 질문은 무의미하다.
나 자신 혹은 내 아이의 현재 상태에 맞는 책을 고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영국에서 책 고르기가 처음이라면, 도서관이든 서점이든 꼭 직접 가서 책을 펼쳐보고 판단하자.
커버 이미지: Photo by Clay Bank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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