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4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영국의 우체통에 영국의 역사가 보인다

by 정숙진 Feb 13. 2025
아래로

"어... 우체통인데 사용을 못한다고?"


작은 해안가 마을을 여행하는 중이었다.


불규칙한 모양의 자연석을 쌓아 만든 돌담 사이에 생뚱맞게도 빨간 철문이 달려 있었다. 개인 사물함 크기의 녹슨 철문이었다. 


행인들로 북적이는 도시 한복판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여느 우체통과는 사뭇 다르지만, 붉은 색상과 그 위 새겨진 글자만으로도 존재를 알 수 있었다. 


그 예전, 이 정도 크기로도 소통 가능한 시절이 있었겠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더 큰 우체통에 역할을 양보했으리라. 


브런치 글 이미지 1




남의 집 담장이나 버스정류장 귀퉁이에 부착되어 주민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이런 작은 우체통은 영국의 소도시와 시골 마을에서 아직도 볼 수 있다.


여름답지 않게 질척거리는 날씨에 대비해 가족 모두가 비옷과 장화로 무장한 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마을 곳곳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울퉁불퉁한 돌담과 그 속에 자리 잡은 우체통으로 이곳 역사도 가늠해 보고 말이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 상단에 V와 R이라는 알파벳이 보이는가? 


그 아래에 OUT OF SERVICE라는 문구가 희미하게 남아 있고, 더 밑으로는 하얀 직사각형의 공간도 보인다. 우편물 수거에 관한 정보가 담겨야 할 공간이지만, 이미 사용 중단된 우체통이니 공란으로 남겨졌다. 


표면에 새겨진 문구를 읽기 힘들 정도로 낡아 버렸으니, 아직 사용 중인 동시대 우체통을 대신 참조해 보자.



dailymail.co.ukdailymail.co.uk



↑ 이 우체통에도 V와 R이라는 알파벳이 박혀 있다. 


V R = Victoria Regina


Regina

* (라틴어) 여왕


빅토리아 여왕의 약자이다. 


영국의 우체통에는 이처럼 군주를 상징하는 문구가 새겨지는데 위 우체통은 빅토리아 여왕 재위 (1837-1901) 시절 세워진 셈이다. 실제, 1853년에 설치되어 지금껏 사용 중인 우체통으로 영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역사와 전통을 중요시하는 영국인답게 이보다 더 오래된 우체통이 있다면 그마저 지금껏 보존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아쉽게도, 현대적인 개념의 우편 서비스가 도입된 시기가 바로 빅토리아 시대이기에 이보다 더 오래된 우체통은 없다. 


이처럼 이전 군주 시대에 쓰던 우체통을 지금도 그대로 활용하지만, 영국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우체통은 따로 있다. 



ReutersReuters



E II R = Elizabeth II Regina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뜻한다. 


1952년부터 2022년까지 무려 70년이라는 영국 최장수 재위 기록을 보유한 군주이니 그 이름을 새긴 우체통 또한 많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우체통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바로, 스코틀랜드에서 우체통을 고의로 훼손한 일이


E II R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라는 말은, 엘리자베스 1세 또한 군주로 인정한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한 국가는 지금의 영국이 아닌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만 국한된다. 여기에 스코틀랜드가 병합된 시기는 엘리자베스 1세가 죽고도 100년이 지나서다.


지금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 스코틀랜드인이, 엘리자베스 2세의 이름이 담긴 우체통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E II R에서 로마 숫자를 지워버리거나 우체통을 통째로 폭파시키려는 시도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이제 찰스 3세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니 새 군주를 기리는 우체통도 있지 않을까?


물론, 있다.




undefined
undefined
dailymail.co.uk
브런치 글 이미지 7



↑ 찰스 3세의 이름이 담긴 최초의 우체통임을 알리는 내용이 우체통 뒷면에 적혀 있다.



C III R = Charles III Rex 



Rex

* (라틴어) 왕


Cypher

* 이름 첫 글자들



2022년부터 재위를 시작하였지만, 찰스 3세를 상징하는 우체통이 처음 설치된 건 2024년의 일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물론 그 이전 시대에 설치된 우체통도 아직 멀쩡한 상태라, 새 우체통을 설치한 사례는 많지 않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되면서 종이 편지를 이용하는 사람이 크게 줄어들기도 했지만 민간 배송업체와도 경쟁하는 바람에 우체통의 인기가 떨어진 것도 새 우체통 보급을 더디게 한다.


빅토리아 여왕에 이어 에드워드 7세, 조지 5세,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까지 옛 군주를 상징하는 우체통을 영국 곳곳에서 아직도 발견할 수 있는 이유다. 



ruralhistoria.comruralhistoria.com



E VIII R = Edward VIII Rex 


에드워드 8세 왕을 가리킨다.


낯선 이름이라 해도 무색하지 않다. 현왕인 찰스 3세의 큰할아버지로, 재위한 지 1년이 채 되기도 전 왕위에서 물러난 인물이다. 그의 이름을 새긴 우체통은 극히 적을 수밖에 없다. 


여행 책자에 거의 소개되지 않는 영국의 작은 마을까지 돌아다니며 이런 예스러운 우체통 찾기에 재미를 붙인 나조차 아직 발견하지 못한 우체통이다.



lbsg.orglbsg.org



G R = George V Rex 


조지 5세 왕을 상징하는 우체통이다. 


다른 조지 왕 (조지 1세, 2세...)과 구별하려면, G V R로 표기해야 할 텐데 무슨 이유에선지 V가 생략되었다. 우체통 설치 시대에 등장한 첫 조지라는 이름 때문에 별도로 구별할 필요 없다 싶어 이렇게 간략하게 표기했을지도. 




영국의 우체통에 새겨진 글자만으로도 그 역사를 가늠할 수 있지만 앞서 나온 사진에서처럼 우체통 생김새로도 역사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영국을 여행하다가 우체통에 한 번 즈음 눈길을 돌려 볼만한 이유다.


참...

희귀한 옛 우체통을 발견하고 기념사진을 찍거나 그 설치 시기를 짐작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편지를 부치고 싶다면 우편물 수거를 하는 우체통인지 꼭 확인하자. 



영국에 새 군주가 들어서면서 바뀌는 건 우체통만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우체통 보다 더 빨리, 더 확실하게 바뀌는 것이 있다.



bing.combing.com



undefined
undefined
amazon.co.uk



기존의 단순한 우표 형태에서, 바코드가 추가된 디자인으로 변경되었다. 여기에 찰스 3세 이미지가 들어간 우표도 나왔다.


기존의 엘리자베스 2세 이미지만 담긴 우표 (제일 위 파란색, 자주색 우표)는 이제 사용이 불가능하다. 대신, 옛 우표를 새 우표로 교환할 수는 있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Ben Wicks on Unsplash


이전 06화 새벽 2시에 운전하다 경찰과 마주하다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