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M이 내게 한 말이다.
땅콩 주택처럼 건물과 정원까지 맞대고 있는 형태로 M과 우리 집은 이웃이 되었다. 한쪽 집에서 공사를 하거나 음악을 크게 틀기라도 하면 상대 집에 영향을 주곤 한다.
처음 이사 왔을 무렵, 누구나 새로 입주한 집에서 그러는 것처럼, M의 가족은 집 내부와 정원을 새로 꾸미느라 드릴 소리와 못 박는 소리를 종종 내곤 했다.
갑작스럽게 울리는 소리에 끔쩍끔쩍 놀랄 정도로 간이 콩알만 한 나는 옆집의 집 꾸미는 소리에 때때로 정신이 번쩍 들긴 했지만, 우리 쪽에서 창문만 닫으면 웬만한 소음은 차단되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던 옆집에서 앞마당의 흙을 파낸다고 했다.
평소 배수가 잘 안 되어 폭우가 쏟아지면 물이 고이곤 하던 마당을 갈아엎은 뒤 배수로 공사를 하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 굴삭기를 들여와 땅을 파고, 장비를 실은 트럭도 드나들면서 소음을 일으키고 흙먼지가 날릴 수 있으니 우리 집에 피해가 올까 미리 통보도 했다.
마당의 배수로 공사가 끝나면 그 위를 새 흙으로 덮어 땅을 고른 뒤 잔디 뗏장을 까는 일도 기다리고 있다. 이 모두가 하루 이틀이면 끝날 작업이라 그 정도로는 우리에게 큰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이 닥쳤다.
↑ 영국에 물 호스 사용 금지 (Hosepipe ban) 조치가 내려진 것이다.
수도 회사에서 보내온 이메일인데, 같은 동네에 살고 있으니 M도 받았으리라.
강 수위가 현저하게 낮아질 정도로 극심한 가뭄이 이어지고 있으니 물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내용이다. 사실, 경고장에 더 가깝다. 위 주의사항을 위반할 경우 최대 1천 파운드 (한화 약 180만 원)의 벌금형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유사한 내용의 편지가 우편으로도 도착했다.
가정과 기업체, 공원, 학교, 병원, 스포츠 시설까지 어디를 가든 온통 초록빛을 자랑하는 잔디를 사계절 내내 볼 수 있는 영국이다. 눈으로만 즐기는 것이 아닌 그 위에서 마음껏 밟고 달리고 드러눕고, 또 어떤 때는 무분별한 바비큐 파티를 벌여 까맣게 태우기까지 하는 공간으로 말이다.
이 모두 사계절 고른 강수량 덕택에 가능한 일이다.
일반 가정에서는 스프링클러를 설치하지 않더라도 잔디 관리에 큰 어려움이 없다. 어느 계절이든 일주일에 최소 두어 차례 비가 오기 마련이고, 설령 건조한 시기가 이어진다 하더라도 한 번씩 직접 물을 뿌려주면 그만이다.
그런 영국에서 이례적인 가뭄 현상이 지속되자 특단의 조치가 내려졌다.
이전에도 가뭄이 심해질 때면 영국에서는 물 사용을 제한해 왔다. 이런 조치가 내려지면 일반 가정에서 호스를 연결해 물을 뿌리는 행위가 금지된다. 호스를 이용한 잔디와 화단 물 주기도 안 되고 세차도 안 된다. 호스로 물 뿌리며 청소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정원에다 설치해 놓고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간이 풀장 또한 포기해야 한다. 이쯤 되면 아무리 잔디가 누렇게 시들어 말라비틀어진다 하더라도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
당시 물 사용 제한은 영국 전역이 아닌 지자체별로 실시되고 시행 기간도 조금씩 달랐는데 우리 동네는 8월 초부터 실시되었다. 이 때문에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M의 새 잔디 계획은 잠시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잔디 작업 중 뗏장을 덮는 단계에 이르면 새로 깐 잔디가 땅에 뿌리를 제대로 내릴 수 있도록 물을 충분히 줘야 한다. 하지만, 물 호스 사용이 금지되었으니 물 작업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옆집에서는 궁여지책으로 헌 잔디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새 흙을 부어 다져놓는 작업까지만 하기로 했다. 나머지 작업은 정상적으로 물 사용이 가능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미 뿌리를 내려 잘 자라고 있는 잔디도 물 부족으로 시들어가는 판에, 잔디 뗏장을 옮겨다 놓고 물을 주지 않았다가는 곧바로 죽어버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물 호스 사용이 금지되어도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야외에서 호스를 이용한 물 작업을 금한다 뿐이지 물 사용 자체를 제약하는 건 아니니까. 또한, 예전부터 부엌과 욕실에서 나오는 허드렛물을 빈 우유병에 모아두었다가 집안 곳곳에 활용해 왔다. 건조한 날이 이어진다 싶으면 이렇게 모아 놓은 물을 화단에 뿌리면 된다. 집에 수영장은커녕 간이 풀장이나 자쿠지도 없고 세차도 직접 하지 않으니 물 호스 쓸 일이 아예 없다.
그럼에도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아무리 생명력이 강한 잔디라도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물을 주지 않으면 버틸 수 있을까?
온통 초록빛이던 영국의 거리와 들판, 공원이 누렇게 변해가고 시원하게 물줄기를 뻗어가던 호수와 연못마저 눈에 띄게 수위가 낮아지다 못해 곧 바닥을 드러낼 듯한 모습을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그곳에 터전을 잡고 사는 짐승과 곤충은 무사할까?
호스 사용을 금해야 할 정도의 가뭄이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는 점도 우려된다.
바로 며칠 전, 2022년과 같은 금지령이 또 내려졌다.
↑ 이번 주부터 또다시 물 호스 사용이 금지되었다.
안내문에는 강 수위가 정상으로 돌아갈 때까지라고 되어 있다.
당장 내일부터 비가 온다 해도,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강과 저수지 수량이 예전처럼 채워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3년 전 여름에 시작된 물 호스 사용 금지령은 그해 겨울까지 지속되었다. 물 호스 사용과 무관한 계절로 접어들 때까지도 물 부족 사태가 회복되지 않았다는 소리다.
↑ 썰물 때의 갯벌이 아니다. 웨스트요크셔에 위치한 저수지다. 물이 가득 들어차야 할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 얼마 전, 근처 동네에서 실시된 달리기 동호회 모임 사진이다. 평소 초록빛 잔디로 가득한 공원이건만, 지금은 추수를 끝낸 들판처럼 누렇게 변해버렸다.
3년 전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주변 사람과 동식물까지 잘 버텨주기를 빌어본다. 그리고, 환경에 대해 조금 더 신경 써보기로 마음먹어 본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YODA Adaman on Unsplash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