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인 Oct 18. 2024

휠체어 회사 마케터가 휠체어에 앉지 않는 이유

나도 한 때 휠체어를 잘 타고 싶었다.

처음 회사에 입사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독일 출장을 갔다. 독일 뒤셀도르프에서는 매년 세계 최대 재활 보조기기 전시회가 열리는데 회사도 매년 전시회에서 부스를 운영하고 있던 차라 입사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전시회 지원 인력으로 해외 출장을 가게 된 것이다.


어마 어마한 전시회 규모와 난생처음 보는 보조기기들 그리고 세상에 이렇게 휠체어 회사가 많고 다양한 휠체어가 있었구나. 모든 것이 다 처음이고 신기한 와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기억은 우리 부스를 방문한 금발 백인이었던 중년의 비장애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우리 부스에 있는 데모용 휠체어를 타보더니 순식간에  휠체어 앞바퀴를 들고 뒷바퀴로만 균형을 잡으며 멈추어 ‘섰다’.


흔히 ‘휠리(Wheelie)’라고 불리는 휠체어 스킬 중 하나인데, 수동 휠체어 사용자들이 장애물을 넘거나 계단을 오를 때 사용하는 스킬이다. 알고 보니 그녀는 이미 휠체어 업계에서 20년이 넘게 일을 한 배테랑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도 저 사람만큼 휠체어를 잘 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매일 아침 출근을 하면 휠체어를 탔다. 휠리를 할 수 있는 회사 동료들에게 휠리도 배워 연습을 하니 어느새 어설프게나마 휠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는 세일즈 마케터로서 당연하게 갖춰야 하는 업무 역량 중 하나라고 생각을 했다. 휠체어를 잘 타는 것만큼 제품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업무 숙련도를 남들에게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누군가에게 어떤 ‘임팩트’를 남기고 싶었나 보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어느 날 평소와 같이 내 또래의 휠체어 사용자 앞에서 제품을 시연하기 위해 휠체어 위에 앉아 제품을 시연하고 함께 대화를 하다가 일어나는데 ‘나만 휠체어에서 일어나는 순간’이 뭔지 모르게 마음이 찜찜했다. 처음에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휠체어 사용자 앞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는 그 순간’이 점점 더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뭘까, 이 불편한 마음은.


마침 그때는 한 달에 한 번 금요일 퇴근하고 서울로 다양성을 주제로 한 독서 클럽에 참여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한 멤버로부터 우연히 이런 말을 들었다. 시각 장애 친구가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친구와 헤어질 때 “다음에 또 보자”라고 인사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고. 그래서 그날 이후로  “다음에 또 보자”는 말 대신 “다음에 또 만나자”라는 말로 바꿨다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함께 들은 또 다른 멤버는 정의당 장혜원 의원이 21대 국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진행했던 ‘내가 이제 쓰지 않는 말들’이라는 캠페인에 대해 알려줬다. 우리가 한때 쓰기도 했고, 지금도 쓸 수 있지만, 그 말에 담긴 차별과 배제를 인지하고 수정하는 프로젝트가 있다고.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가능하면’ 휠체어 사용자 앞에서 휠체어를 타지 않았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든지 윤리적인 이유는 아니고, 그냥 내 마음 편하자고 한 일이었다. 불편하다고 느껴진 걸 하지 않고 보니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마음 편하자고 일을 제대로 안 할 수는 없지만 생각보다 휠체어 사용자 앞에서 휠체어에 직접 앉지 않고도 제품을 설명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대신 휠체어 사용자에게 직접 타 보도록 권하고 실제 사용자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었다.


휠체어 회사에 다니는 이상 휠체어를 타지 않을 수는 없다. 사실 여전히 휠체어를 많이 탄다. 아마 오늘도 탔을거다. 제품이 개발되거나 변경되어도 테스트하기 위해 타고, 휠체어 위에 앉아서 제품 시연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될 때는 휠체어 위에 앉기를 선택한다. 의자보다 휠체어가 더 많은 근무 환경이기에 가끔은 의자 대신으로 앉기도 한다.어쩌면 이런 나의 조용한 유난은 지극히 개인적인 예민함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매일 하던 인사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바꾼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해 오던 것들이 마음에 걸린다면 이제는 그만해도 좋을 때가 된 것이 아닐까. 나만 알아차릴 아무도 모르는 변화겠지만 어쨌든 나는 아니까. 그렇게 조금씩 변하고 변하지 않으며 우리는 살아가고 있으니까. 대체로 변하지 않는 나이기에 이 정도는 변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02화 휠체어가 휠체어지 뭐긴 뭐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