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제 질문을 바꿔 봅시다.
언젠가 지방으로 <휠체어 사용 아동 이동성향상 프로젝트> 미팅을 하기 위해 내려간 적이 있다. 여러 명의 아이들 중 별이가 기억에 남는 건, 다른 아이들처럼 휠체어를 타거나, 유아차를 타거나, 보행기를 밀거나 하지 않고 별이가 미팅 장소에 걸어왔다는 사실과 별이의 어머님은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전화번호부 책만큼 두꺼운 서류들을 꺼냈기 때문이다.
별이는 연소성 류머티즘 관절염(Juvenile idiopathic arthritis, JIA)이라고도 불리는 소아 특발성 관절염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이 1000명 중 약 1명 꼴로 발병하는 관절염인데, ‘특발성’이란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뜻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별이 어머니가 가지고 온 전화번호부 책만큼 두꺼웠던 서류의 정체는 그동안 병원을 다니며 별이가 '왜' 아픈지를 알아내려고 했으나 '정확히 왜'인지는 알 수 없다는 소견서와 진단서 꾸러미였다.
평소에 별이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잘 걸어 다니고 일상생활을 하다 갑자기 통증이 발생하면 관절 부위가 붓고 열이 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지만 별이는 ‘잘’ 걸어 다니기 때문에 휠체어를 비롯해 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럴 때마다 별이 어머님은 별이가 어떤 지원을 받을 ‘자격’을 ‘증명’ 하기 위한 서류들을 최선으로 모으셨고 그게 어느새 전화번호책만큼의 두께가 되었다.
별이는 별이와 잘 어울리는 노란색 휠체어를 고르고 집으로 갔다. 그리고 휠체어가 별이에게 전달되고 얼마 뒤 별이 어머님은 별이의 일상이 한결 수월해졌다는 메시지와 함께 별이가 즐겁게 외출하고 있는 사진을 보내주셨다. 그 초등학생 별이가 벌써 중학생이 되었고 그림을 그리는 취미로 동화책 그림 작가로도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언젠가 글로벌 휠체어 제조사의 APAC 담당자와 장애인을 위한 정부 지원 제도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호주에서는 장애인을 지원할 때 가장 핵심적으로 하는 질문이 ‘당신이 살고 싶은 삶은 어떤 삶인가요?’라는 것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어쩌면 한정된 예산으로 복지 차원으로 운영되는 국가 기관에서 하기에는 이상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이라는 생각과 함께 부러웠다.
호주의 국가 장애 보험 제도인 NDIS(The National Disability Insurance Scheme)는 '누구나 자신의 능력이나 상황에 상관없이 평생 목표를 세우고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또한 NDIS는 장애가 있는 사람이 설정한 삶의 목표와 이를 달성하기 위한 능력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는데 중점을 둔다. 이런 NDIS의 지원을 바탕으로 장애인 당사자를 비롯해 가족, 활동 보조인, 전문가 등 모든 이해 관계자들은 당사자가 세운 삶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협력한다.
별이의 이야기와 APAC담당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생각해 보니, 한국이 [‘이것’을 지원받기 위해서는 당신이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입증’ 해야 합니다.]라는 차원에서 접근을 하고 있다면, 호주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정하고, 그 삶을 살기 위해 ‘충족되지 않는 필요를 발견’하세요. 그러면 ‘그 필요’를 지원해 드리겠습니다.]로 접근을 하고 있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뿐만 아니라 '미래의 당신의 삶이 어떻게 보이기를 원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도록 권장한다고 한다.
NDIS의 '당신이 살고 싶은 삶은 어떤 삶인가요?'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지금 보다 더 나아지길 바랍니다.'라는 것을 넘어 '구체적으로 도달'할 수 있도록 ‘삶의 8가지 영역’에서 개인의 충족되지 않은 ‘필요를 발견’하는데 아래와 같은 질문들을 한다고 한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에게도, 아니 모든 사람들이 인생을 살며 스스로에게 해보면 좋을 질문들로 가득하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것처럼 ‘인간은 왜 존엄한 존재인가?’가 아니라 ‘어떤 사회적 관계와 조건 속에서 인간은 존엄해질 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바꿔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질문을 바꿔야 할 때가 아닐까.
1. 개인의 선택과 통제(Personal choice and control)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과 방향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질문: “당신의 선택이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시나요? 당신의 삶을 형성하는 결정들에 대해 통제력을 느끼시나요?”
2. 평생 학습 (Lifelong learning)
NDIS는 교육 제공 및 그와 관련된 비용 지원은 포함되지 않지만, 학교 이후의 선택지, 추가 교육, 그리고 더 나은 학습 환경에 접근하고 참여하는 것을 지원합니다.
질문: “특정 주제에 대해 더 배우고 싶으신가요? 자기 벌전이나 업무 능력 향상을 위해 교육이나 훈련을 받고 싶으신가요? 이와 관련된 상황에서 어떤 점이 어려운가요?”
3. 일상생활 (Daily living)
독립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는 개인 관리, 가사, 이동, 그리고 지출 관리를 포함한 일상생활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문: “당신은 일상생활의 과제를 원하는 수준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느끼시나요? 어떤 점이 어려운가요?”
4. 관계 (Relationships)
관계는 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세상에서의 위치를 느끼는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촉진할 수 있는 지원이 있으면 삶이 변할 수 있습니다.
질문: “현재 당신이 맺고 있는 관계들에 대해 어떻게 느끼시나요? 더 나아질 수 있을까요? 무엇이 도움이 될까요? 앞으로 어떤 종류의 관계를 맺고 싶으신가요? 그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무엇이 도움이 될까요?”
5. 건강과 웰빙 (Health and wellbeing)
건강과 웰빙이 우선시될 때 나머지 목표들이 더 쉽게 달성될 수 있습니다. 적절한 운동, 식단과 요리 관련 조언 등 전문가들의 정기적인 지원을 통해 이동성과 기능을 개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문: “ 당신의 건강 상태에 대해 어떻게 느끼시나요? 더 나아질 수 있을까요? 무엇이 도움이 될까요?”
6. 일 (Work)
유급 또는 자원봉사 역할로서 직장에 나가는 것은 아침에 일어날 동기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직장은 목적의식을 개발하고 동료들과의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삶의 질을 유지하거나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질문: “유급 또는 자원봉사 역할로 일하고 싶으신가요? 이 상황에서 어떤 점이 어려운가요? 무엇이 도움이 될까요?”
7. 사회 및 지역사회 참여 (Social and community participation)
지역 사회에 의미 있는 방식으로 참여하는 것은 소속감과 시민의식을 강화시켜 줍니다. 콘서트에 참석하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거나, 특별 관심 그룹에 참여하는 등, 자신이 속한 작은 세계를 넘어 우리의 열정과 관심사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자아감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습니다.
질문: “지역사회 내 활동, 행사, 모임에 참여하고 싶으신가요? 어떤 점이 어려운가요?”
8. 집 (Home)
집은 우리의 본부이자 안전한 공간, 피난처입니다. 집을 안전하고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목표는 하루를 시작하는 강력한 기반을 만듭니다. 또한 집을 어디에 두고 싶은지, 독립적으로 살 것인지, 지원과 함께 살 것인지, 가족과 함께 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 역시 기본적인 결정으로서 중요한 목표가 될 수 있습니다.
질문: “당신은 집에서 안전하고 독립적이라고 느끼시나요? 현재의 생활환경에 만족하시나요? 더 안전하고 독립적이라고 느끼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어떤 생활환경을 원하시나요?”
* 위 글에서 언급된 별이라는 이름은 가명입니다.
* 위의 8가지 NDIS 항목과 내용은 NDIS 참여자들을 위한 온라인 커뮤니티 플랫폼 Kinora에서 발췌한 내용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