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은 푸른색 천 주머니를 소중히 감싸 쥐었다. 뜨거운 불길에서 생존했기 때문일까? 손에 닿은 첫 느낌은 차가웠다. 마치 설의 체온을 빼앗아 갈 것 같은 서늘함…. 하지만 잠시 후 주머니는 마치 생명처럼 자신의 체온을 조금씩 채워나갔고 설에게도 그 따스함이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설은 한참 동안 주머니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 작은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보드랍고 따스한 감촉은 신기하게도 설의 슬픈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마치 ‘괜찮다’, ‘다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그날 밤, 설은 아빠의 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가는 내내 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빠는 룸미러를 통해 흘끗흘끗 설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빠의 그런 행동은 일종의 죄책감 때문이었겠지만 설은 아빠의 얇디얇은 죄책감에 분노하기엔 너무 많이 지쳤다. 이제 설의 텅 빈 마음속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감정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책임지지 않은 부모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분노도 애정과 열정이 있어야 가능하다. 설의 마음엔 예전부터 그런 감정은 모두 휘발되어 버리고 없었다. 대신, 설의 마음속 깊이 남은 감정은 짙고 어두운 초록빛이었다. 선택받지 못한 아이…. 내팽개쳐져도 될 만큼 귀찮고 짐만 되는 아이로 살아남은 자신에 대한, 한심함과 부끄러움이었다.
“다 왔다.”
시끄러운 엔진 소리가 가득한 도로 옆 낡은 5층 건물 앞에 아빠의 차가 멈췄다. 설은 차에서 내렸다. 밤기운이 찼다. 주변 건물들은 자신의 낡은 모습을 숨기려는 듯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치장하고 있었지만 모두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설은 본능적으로 가방에 넣어둔 푸른색 천 주머니를 찾았다.
“네가 설이구나? 따라와.”
순영이 고모가 설에게 한 첫마디 말…. 표정처럼 건조하고 푸석푸석했다. 설은 인사를 꾸벅하고 순영이 고모를 따라갔다. 뒤에서 아빠가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아빠의 차가 엔진소리를 내며 떠났다.
순영이 고모의 집은 3층이었다. 건물에 들어가는 순간 지하에서부터 스며오는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계단을 오르는 동안 그 냄새도 견딜 만해졌다. 설이 겪은 세상의 모든 일이 대부분 이런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듦과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점차 그 속에서 살아가는데 익숙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정말 온 거야?”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단발머리에 얼굴이 종알거렸다. 얼굴 모양새는 고모보다 덜 건조한 느낌이었지만 불만이 가득했다. 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넌 방에 들어가 있어.”
“엄마!”
고모의 짧고 딱딱한 목소리에 단발머리 얼굴은 짧은 비명처럼 고모를 부르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기가 네 방이야. 좀 좁지만 견디고 살아.”
고모가 작은 방을 열며 말했다. 할머니의 쪽방처럼 작고 텅 빈 방이 눈에 들어 왔다. 설은 꾸벅 인사를 하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축축한 흙냄새가 났지만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란 걸 설은 잘 알고 있었다.
“짐 풀고 쉬어.”
고모가 사라지자 설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제부터 여기서 살아야 한다. 여기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얼핏 본 고모의 형편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고 아빠가 설의 생활비를 보태주지 않을 것이란 것은 설도 잘 알고 있었다. 1년? 2년? 운이 좋으면 3년? 설은 이 좁은 방에서 세월을 잡아먹으며 살아남아야 한다. 그 순간순간에 최대한 감정을 숨기고 있어야 하고 말이다. 사실 설은 이런 생활에 익숙했다. 할머니 댁에서 살아갈 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조용하고 말 없는 성격…. 그것이 설의 타고난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당 할미의 손녀라는 주변의 속삭임도 한몫했다. 부모님에게 버림받고 지독한 신을 모신다고 소문난 무당 할미와 살아가는 음침한 소녀가 세상을 견디고 살아가기 위해선 감정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설은 어느 틈엔가 피부 깊숙이 배우고 있었다.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설이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설은 방 바닥에 모로 누워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러다 할머니와의 추억마저 모두 사라져버리면 어쩌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설은 울컥 눈물이 나왔다. 그날 밤 방바닥의 냉기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서늘했다. (계속.... 화요일에 입데이트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