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 보다 바깥밥이 더 맛있을 때
우리 집은 요리로 시간을 나눌 수 있다. 크게 할머니가 요리하던 시절과 엄마가 요리하는 지금으로 나눌 수 있겠다. 기억이 날 때부터 나는 할머니와 항상 함께였다. 유치원 때 입학식 모든 졸업식 운동회는 늘 할머니였다. 곰곰이 생각해도 어릴 때 엄마가 오지 못해서 서운함은 없었다. 엄마는 바빴다. 학원에 나가야 했고 출장을 다녔다. 할머니는 학원의 매점을 책임졌다.
엄마는 할머니가 아프기 전까지 요리를 하지 않았다. 우리 집 요리사는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만든 떡볶이가 생생하다. 할머니가 아프고 나서 엄마는 요리를 시작했다. 그때 나는 고 2에서 고3으로 넘어가던 무렵이었다. 우리 셋 모두 정신이 없었다. 한 가지는 기억이 난다. 엄마의 괴랄한 첫 요리가 아직 충격이다. 공부를 하던 날 위해 엄마는 야식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빵 속에 차가운 사과, 마요네즈와 토마토 그리고 따뜻한 양배추. 양배추는 어쩌다 따뜻해진 걸까? 차갑고 뜨겁고 따뜻하고 느끼하고 이상한 맛이었다.
엄마는 어느 날부터 닭볶음탕을 열심히 요리했다. 닭볶음탕이 물릴 때쯤 어디서 레시피를 보고 와서 카레가루를 넣기 시작했다. 십 년 정도가 흐르니 이제 닭볶음탕은 자신감이 생겼는지 집에 가면 엄마 닭볶음탕은 잘해~ 라며 한 냄비 끓인다.
수능날 엄마는 도시락을 싸줬다. 일단 메뉴는 미역국이었다. 그렇게 미신을 잘 믿으면서 왜 미역국이었을까. 내 보온 도시락은 열리지 않았다. 전교 1등과 전교 회장이 밥과 반찬을 나눠줬다. 수능이 끝나고 엄마를 보자마자
"도시락 안 열련!!! 엄마 이거 뭔 일!!"
하고 소리쳤다.
뜨거운 미역국을 넣고 엄마가 뚜껑을 너무 바로 닫은 게 실수였다.
"아이고게 너 게믄 머먹언?"
"나 1등이랑 회장이 밥나눠줜"
엄마는 어디 가서 1등 밥 먹었다고 하지 말라며 나를 웃겼다. 수능성적이 별일 없이 나왔는데 1등 밥 먹어서 그렇다 했다. 그리고 육지로 대학을 가서 엄마의 요리는 방학 때 내려가서 먹는 게 전부였다.
어느 날 제주에 내려갔다가 아보카도 명란 비빔밥을 했다. 아보카도가 처음인 엄마랑 할머니는 이게 뭐냐며 타박했지만 곧 그 맛에 푹 빠졌다. 자주먹으니
저염명란젓을 샀다. 아보카도가 익은 느낌이 손에 익지 않은 엄마는 자꾸 설거나 까매진 아보카도를 샀다. 몇 번의 실패뒤 먹을 수 있는 걸 익혔다.
남편이 처음 우리 집에 오던 날 엄마는 요리를 굉장히 해주고 싶어 했다. 손목이 너무 아프다 하고 자신이 없어해서 할머니와 내가 뜯어말렸다. 이모는 사위에게 전복 구이에 오색장식을 올리고 고등어조림을 해줬단다. 그 집 사위가 우리 집에 와 칭찬하는 모습을 보고 본인도 하고 싶어 했다. 아니 사람마다 다 잘하는 게 다른 법인데.
참고로 나는 소고기 뭇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건 성게 미역국이다. 미국에서 제주에 오는 날이먼 엄마는 내가 좋아한다며 소고기 뭇국을 끓여놨다. 매번 나는 성게미역국을 좋아한다며 정정한다. 엄마는 작년에도
“너가 좋아하는거 소고기 뭇국 맞지?” 라며 소고기뭇국을 내놨다. 어쩜 매번 헷갈리는지 모르겠다며 말하는 나에게 사촌언니는 말했다. 이제 언젠가 소고기뭇국만 보며 울날이 온다고.
엄마의 요리는 분명 고등학교 때보다 성장했다. 엄마는 자꾸 엄마 요리가 맛이 없어서 할머니가 싫어한다고한다. 엄마의 난 잘 못해 병이 나온다. 할머니는 이제 이가 거의 없고 소화가 느려 부드러운 것만 드신다. 십 년 연습한 닭볶음탕 대신 창의력을 발휘해 재료를 갈고 부친 요리를 한다.
나는 미국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배가 고픈데, 한국에 가면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다. 친구는 고향에 오니 배가 안 고픈 거라 했다. 사람들은 집밥 엄마 손맛을 그리워 한다. 내게 유난히 기억나는 집밥 맛은 없다. 나는 엄마랑 밥상에서 같이 오래 뜯고 싸우고 싶다. 소고기뭇국 만 번 먹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