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에는 엄마와 할머니

들여다봐도 희미할 때가 있다.

by 곰곰

아주 가끔 할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상상을 한다. 집에 혼자 있을 때 창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릴 때 그렇다. 아직 문을 열기 위해 번호를 띡띡 누르던 시절이 아닌, 열쇠를 드르륵 돌려야 되던 때, 그 소리가 나면 후다닥 방에서 책을 보는 척하거나, 채널을 어린이 다운 채널로 돌리거나.


또 자주 떠오르는 건 어딘지 모를 길 위를 할머니가 자주 입던 마이를 입고 뒷짐 지고 걸어가던 모습이다. 할머니가 뒷짐을 지고 걸었었나?


할머니랑 나는 노래방에 자주 갔다. 할머니가 칠갑산이라는 노래를 자주 불렀던 것 같은데 어떻게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이 안 난다.


할머니가 떡볶이를 맛있게 했었다는 문장만 남았고 그 떡볶이 맛이 기억이 안 난다. 이런 조각들이 넘친다. 우리가 지금 사는 아파트에 이사오던 날 눈이 새하얗게 세상을 덮었던 건 기억이 나는데 할머니 얼굴이 어땠나 기억이 안 난다. 할머니가 아프기 시작한 게 내가 고2 때다. 그 때부터 몇 년간의 기억들은 흐릿하다. 내 인생의 반 반을 건강한 할머니와 아픈 할머니가 있다는 건데 앞의 반이 희미하다. 침대 위에 고개를 떨구고 손만 잡았다 폈다 하는 할머니의 뒷목만 선하다. 할머니의 마음은 조용했을까 내내 시끄러웠을까. 물어보고 싶은데 할머니는 자꾸 내 이름도 까먹는다.


누가 십억을 줄 테니 옛날로 돌아가서 실수를 고치고 올래? 아님 십억을 안 받을래?라고 물었다. 하나도 안 줘도 되니 몇 번만 할머니를 보고 오고 싶다. 우리 할머니가 돈 세던 모습 떡볶이를 만들던 모습 성큼성큼 걸어 다니던 모습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던 모습. 눈에 잠시만 스쳐도 좋으니 보고 오고 싶다.


나는 자주 무의식적으로 할머니와 엄마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꾹 잠가 놓은 마음 안에 가끔 어디서 엄마, 할머니 이야기가 나오면 왈칵 눈물을 쏟았다. 엄마에게서 점점 할머니의 모습이 느껴지고 내 키가 엄마보다 크다고 느낀 날일까. 내 코 옆 팔자주름을 이리저리 펴보다 아, 뭐야 왜 이렇게 시간이 흘렀어. 한다. 엄마와 할머니 옆에 꼭 붙어살았으면 나는 좀 더 우리의 모습들을 선명하게 기억할까?


공부 열심히 해서 외국 가라던 엄마는 이제 왜 공부해서 외국 갔냐 뭐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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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