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또 늙었다. 4월의 생기는 어디로 가고 얼마 전 통화에서 엄마 얼굴에서 할머니가 보였다. 6월에 할머니의 요양원에 대해 결정하겠다던 엄마는 9월이 코앞인 지금 밤새 이불에 할머니 똥 치운 이야기를 한다. 어제는 할머니가 날 엄마로 부르고 어제는 엄마를 106호라고 불렀단다. 늙어가는 엄마를 둔 사람으로서 엄마의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엄마는 내가 한국에 오면 에너지 부스트가 생긴다. 분명 전화 속에서 더 늙은 얼굴이었는데 만나면 몇 달 전과 비슷해 보인다. 사이사이 여기 아프다 걱정이다 말 들을 힌트 삼아 건강을 체크한다. 엄마의 건강과 부침을 걱정해 이거 사줄까 저거 해볼까 하는 나의 제안은 엄마는 거절한다. 나중에, 아니면 돈은 아껴야 한다, 네가 돈이 어디 있어라는 말을 들으며 나는 무력해진다.
어쩌면 엄마는 내 삶을 응원한 유일한 사람이다. 중간중간 아주 자주 의심과 걱정을 같이 보탰지만. 나는 뭘 하나 이루는데 남들보다 오래 걸린다. 왜 현실은 안 보고 유니콘만 쫓니 같은 말을 많이 들었다. 엄마도 그 말에 보태면서도 응원했다. 잘 될 거야 보다 아휴 너는 좀만 더 잘하면, 더 잘할 수 있는데,라는 힘 빠지는 말과 함께 항상 내 옆에 있었다. 유학생활이 힘들어서 전화하면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라는 데로 안 가고 다른 데로 튀는 딸을 지켜봐 주었다.
요즘 우리의 역할은 엎치락뒤치락한다. 내가 엄마를 응원할 일들도 생긴다. 물론 엄마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엄마가 일을 그만두는 것도 응원했고 이런저런 공부를 해보는 것도 응원한다. 한국어 강사 자격증을 따볼까, 철학을 배워볼까, 영어토론모임을 나가볼까, 엄마는 평생 못한 공부를 한풀이하듯 하나씩 영역을 늘려나간다. 그러면서 엄마는 우울하다고 한다. 이거 해서 뭐 하냐며, 영어 백날 해도 안 는다, 남들이 돈 안 벌고 공부한다고 웃는다, 창피하다, 라며 하소연한다.
그럼 나는 엄마 해보는 게 대단한 거다, 원래 뭐든 잘하려면 시간이 든다, 남들이 뭐라고 하는 게 뭐가 중요하냐, 잘하고 있다 고 반복한다. 우습게도 스스로에게 못 하는 말들을 엄마에게 나무라듯 말한다. 엄마가 팔이 아파서, 등이 아파서, 더공부 하고 싶은데 못 하겠다 할 때 마음이 철렁한다. 마치 내가 하고 싶은 걸 못하게 되는 혹은 아끼던 걸 잃어버릴까 무서워진다.
하고 싶은 거도 배우고 싶은 것도 많은 엄마에게 또 할머니 이야기를 꺼낸다. 그게 엄마의 삶을 무료하지 않게 해주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본 적은 없냐는 말에, 난 엄마의 삶이 한 번도 무료해 보인 적이 없단 걸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