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취방에는 손바닥만한 부엌과 화구 하나의 작은 인덕션이 있었다. 집에서 라면 끓여먹을 냄비 하나를 가져다 두었지만, 자취생활을 관둘 때까지도 그 냄비는 사용된 적이 없었다. 물을 데우고, 라면을 끓이고, 설거지를 하고, 이따금씩 손바닥 반만큼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너무나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에 퇴근길에 항상 도시락을 사오거나 적당한 분식집에서 혼자 매운 오징어 덮밥 하나를 먹고 오는게 일상이었다. 그런 내가 시집을 가서 주부가 된다고 하니, 걱정이 앞섰을 엄마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미국으로 떠나기 일주일 전, 엄마는 내게 흰밥에 곁들여먹을 아주 기본적인 반찬 만드는 방법을 알려줬었다. 칼을 잡는게 무서워서 애호박 하나 제대로 썰지도 못하는 내게.
이곳에 오고나니 요리는 더 이상 귀찮은 일과가 아니라 생존이 되어버렸다. 내가 요리하지 않으면, 밖에서 사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곤 햄버거와 감자튀김, 그리고 피자와 다이어트 콜라정도였으니까. 미국에 올때 어마무시한 짐 가방에 딱 한권, 무작정 사놓고 한번도 보지 않은 요리책을 껴 놓았었는데 사실 책까지 가져올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이 인터넷에 있었으니까. 당장에 먹고 사는 일이 달리니 요리실력은 노력하지 않아도 곧잘 늘었다. 아무것도 없는 부엌 선반에 간장이 생기고, 미림이 생기고, 마침내 까나리 액젓까지 들어섰다. 어쩌다 엄마에게 물어보고 싶은 소소한 집안일들은 낮에 사진을 찍어놓고 시차가 허락하는 순간 통화로 해결했다. 요리는 내가 생각해도 내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빨리 성장한 스킬이다. 지금은 한번에 반찬 세가지와 국까지 동시에 조리할 수 있지만, 처음에는 밥 하나에 딱 반찬 한가지가 한계였다. 남편은 아직도 내가 처음으로 끓여주었던 그 달콤한 김치찌개를 잊지못한다. (물론 맛있어서 달콤한게 아니라, 진짜 설탕을 들이부어서 못 먹을 정도로 달콤했다.) 적당량의 설탕은 돼지고기에 감칠맛을 더해준다길래 넣었는데 왜 그렇게 달았던건지.
언젠가 아빠가 전화로 결혼하더니 내 표정이 무척 행복해졌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인지 처음 아셨다고. 그냥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청소와 빨래를 하는 나날들인데 회사에서 대리로 승진했을 때보다 더 행복했다. 이렇게 행복하다가는 갑자기 불행이 들이닥칠 것 같아 무서울 정도로. 가끔씩 이러다간 내 경력이 완전히 끊겨서 다시는 일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미 태평양은 건너버렸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 남편이 이런 내게 새로운 타이틀을 건네주었다.
- 용용공사, F&B부서 부장.
글로벌한 미국 지부에 100세까지 근속할 수 있는 노후 보장, 사원 딱 2명의 말 그대로 가족같은 분위기의 회사다. 내가 한국에서 데려온 우리집 인형들이 총무부를 맡고 있고, 남편은 회장이자 와이프 멘탈관리부의 부장직을 겸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