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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순 Oct 13. 2021

그리고, 결혼까지

거뭇거뭇한 다리의 숲이 보인다. 정말이지 다리들만 보인다. 이렇게 다리들이 많았나? 바지 다리, 스타킹 다리. 종류도 제법.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람에게는 다리가 있다. 다리들은 말 한마디 없이 흔들리는 출근길 콩나물 지하철 진동에 맞춰 무성하게도 서 있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은 대체 왜 하는 거지?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음악 소리가 어우러지는 게 어쩐지 처량한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지친 주인공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전형적인 '나 힘들어' 스토리의 하이라이트처럼 말이다.

 무미건조한 일상이 화가 나서 봄이 온다는 부푼 마음으로 챙겨 입은 새로 산 꽃무늬 블라우스. 이 블라우스의 행복한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약발은 벌써 효력이 다했다. 어제 미팅 시간에 마셨던 홍차의 아몬드 향이 정말 좋았었는데. 그 차의 이름은 뭐였을까. 비싼 걸까. 그 차를 다시 한번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 블라우스에 속아 넘어간 주제에 나는 또다시 행복한 기분을 차라리 돈으로라도 사고 싶은 나 자신과 사투를 하며 그 날도 출근을 했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응, 회사는 어때 버틸만해? 생각보다 꽤 오래 다니네.크큭."

"안 그래도 조금 있으면 곧 정리할 거 같아요. 결혼하고 해외로 가게 됐어요."

"뭐야, 경력 죽어라 하고 열심히 쌓더니 결국은 밥순이 하러 가는 거야?"

 

 오랜만에 만난 옛 직장상사의 말, 밥순이. 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의 하루를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다시 돌아오면 얼마든지 재취업할 자신 있는데요. 저 아직 젊어요. 나이가 무기예요."

"크크. 그래?"

 

 퇴사를 결심했을 때는 시기가 가까워 올 때까지 향후 가게 될 곳과 상세한 개인 사정을 절대 회사 관계자들에게 말해선 안된다는 것을 첫 번째 퇴사에서 배웠었는데 나는 참 멍청했다. 그래도 그동안의 함께 해왔던 도리는 지키고 싶었던 나는 또다시 사람을 믿어보고 싶어서 결국 상사에게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해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여직원은 뽑아봤자 결혼해서 퇴사한다는 나쁜 선례를 임원진에 교육시켜버렸으니 어쩌면 나 때문에 면접의 기회를 박탈당했을지 모르는 여자 후배들에게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쿨하지 못한 퇴장이라는 것이 인정하기는 싫지만 어쨌든 이젠 정말로 정리할 때가 도래했다.


 정말 내가 마음으로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 괴롭지 않게 살고 싶다.

 

 그래서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결혼한다고 튀었다. 새로운 것을 도전하기 위해, 낯선 땅에서 새 학교를 들어가겠다는 핑계를 곁들여서. 열 살 이상 나이 차이 나는 동료들에게 둘러 쌓여 눈칫밥 먹는 인생을 종료했다. '넌 차장님인 내가 만만하게 보이냐.'는 이제 듣지 않아도 된다. 내심 나이 차이가 나더라도 서로를 존중해주고, 편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힘으로 동료를 짓누르는 일이 없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되길 바랬다. 아니면 아닌 것이다. 아직 책임질 자녀들이 없으니 더욱 시도해 마땅한 도전 아닌가?

 아쉽게도 계획했던 것처럼 회사 컴퓨터의 바탕화면에 그 유명한 Dobby is free! 를 깔아놓고 나오지는 못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좀 배포를 크게 가지고 깔고 나올걸 그랬지만. 다른 부서에 기웃거려서 내가 나간다는 장대한 퍼포먼스를 보여줄 새도 없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책상 위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버리고, 한톨의 흔적도 없이 그렇게 치웠다. 나라는 부품은 다시 잘 다듬어 맞춰 끼우면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한 것이었기에 소란 같은걸 떨 필요도 없었고, 동료들이 아쉽다고 한들 며칠이 지나면 나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걸 새하얗게 잊어버리게 될 거라는 걸 첫 번째 퇴사를 통해 배웠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조용히, 깔끔하게, 이곳을 떠나기만 하면 된다. 상사는 결국 나를 보내는 끝자락에서도 내가 선택한 길이니 반드시 후회는 할 것이지만 그에 따른 책임은 지라고 말했다. 떠나는 마당에 후회할 거라니, 저주를 걸어도 이렇게 상큼할 수가.


 퇴사 후 다음날, 목욕재계를 위해 가까운 대중목욕탕을 찾았다. 주말에는 그렇게도 도떼기시장 같았던 곳이었는데, 이렇게 깔끔하다니. 살갗에 달라붙어버린 묵은 회사 공기를 벗겨내기에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이른 시간의 마트도 주말에 방문했을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점심시간 전이라 그런지 싱싱한 야채, 축산물에서부터 다양한 시식까지 그동안 관찰하지 못했던 마트의 재밌는 마케팅 요소들이 보여서 즐거웠다. 무지막지하게 줄을 서서 최대 20분 안에 목표물을 수습해야 하는 대혼란은 없었다. 고기는 기름이 적은 부위로 덩어리 채, 콩이나 채소 같은류는 손질이 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것으로 원재료를 추구하는 엄마의 장보기 기술은 그동안 퇴근 후의 식탁에서 아무 생각 없이 입으로 욱여넣었던 음식들이 왜 그렇게도 깔끔한지 보여주는 증거들이었다. 장보기 꿀팁 같은 건 시중의 그 어떤 책에서도, 유튜브에서도 배울 수 없었는데 결국은 어느 정도신부수업이 필요한가 보다. 칼을 가는 방법, 고기를 용도별로 자르는 방법, 감칠맛을 내는 방법. 오랜 세월 동안 한 개씩 쌓아오신 엄마의 노하우를 전수받는다는 것은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하기 싫은 정보를 억지로 머릿속에 욱여넣어야 하는 행위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요한 몰랐던 지식들을 머릿속에 채워 넣는 뿌듯함은 지금 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니까.


"여기서는 왼쪽 끝으로 핸들을 충분히 다 돌려서 들어가고자 하는 자리에 차의 꽁무니를 집어넣는 거야. "

"아... 모르겠다. 정말. 나 진짜 면허 어떻게 땄지?"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기어이 주차 연습도 꾸역꾸역 해냈다. 공간 지각력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내게 주차나 운전은 할 때마다 새롭다. 나는 대체 얼마나 더 지나야 혼자서 모든 역할들을 거뜬히 다 해내게 될까. 도마 위에 가지런히 놓인 두부를 부드럽게 가르는 칼끝의 쾌감은 회사에서 이리저리 깎여나간 마음을 둥글게 도려나갔다. 아빠가 퇴근하시면 자연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위안받는다고 하시는 느낌이 이런건가?



 엄마는 장을 보고 돌아와서도 다섯 시간이 지나도록 자리에 앉지를 않으셨다. 재료를 정리하고, 콩껍질을 벗기고, 반찬거리를 만들고, 늦은 점심을 먹고, 먹은 그릇들을 치울 때까지 노동은 계속되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집안일을 우습게 보고 있었는지 하루정도 관찰만 했을 뿐인데, 소고기 뭇국이 채 끓여지기도 전에 나는 다리가 아파서 결국 의자를 질질 끌고 오고야 말았다. 장시간 앉아서 마우스랑 키보드로 손가락만 움직이고 여기저기서 입에 넣어주는 걸 받아먹기만 했으니, 체력이 후달리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나 말고 음식을 찍으라니까 내 얼굴은 자꾸 왜 찍어. "

 "재밌잖아. 나중에 이 반찬 해먹을 때 이거 보면 집에 오고 싶겠다. 너무 웃겨."

 "아, 굴소스를 먼저 넣었어야 하는데 너 때문에 까먹었다."

 "킄킄킄. 뭐야 깨로 마무리하는 거라면서 다시 굴소스 넣어? 탄다 타."

 "몰라. 너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 NG야 NG."

 "푸하하하하."




 나와 그 사람이 결혼하던 날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었다. 찾아준 손님들마다 결혼식 당일에 비가 오면 신랑 신부가 더 행복할 것이라고 격려해주셨다. '신부님'이라는 호칭은 너무나 낯설었다. 출장뷔페 담당 실장님의 첫마디도, 웨딩드레스 렌탈점에서 온 첫 문자도 '아, 신부님이세요?' 였다. 본식이 끝날때까지도 이 호칭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무튼 나한테는 절대 오지 않을줄 알았던 형식적인 의식이 결국 오기는 왔고, 나는 그 의식에서 꿈꾸듯 중앙에 서 있었다. 나와 그 사람은 간소한 결혼을 하고 싶었다. 반드시 셀프웨딩이지 않아도 되었고 그렇다고 또 너무 초라할 필요도 없었다. 모두의 앞에서 그 날의 주인공으로써 부러움의 눈길을 받는 행사가 아니라, 그냥 뭐든 우리 힘으로 ‘스토리’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우리 웨딩사진에는 셀카봉과 촌스러운 브이가 등장한다. 아름다운 라인이 들어나는 모델같은 컷은 더더욱 없다. 데이트 하며 찍어둔 짤막한 영상들로 웨딩 영상을 직접 만들었다. 한복은 고궁 데이트를 하며 찍었던 셀프 사진으로 대체했다. 결혼식 당일에도 식장에 대형 이젤은 없었다. 부케는 엄마가 고속 터미널에서 생화를 사다가 만들어 주셨다.

 

 

"엄마가 시집갈 때 샀던 귀걸이야. 어디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이 골동품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네. 그때 참 이깟 귀걸이 뭐라고 사야 된다고 참 난리 쳤었는데 지금 보니까 너무 웃긴다."

 

 살짝 녹슬었지만 거의 삼십 년 전의 모습 그대로다. 엄마의 드레스를, 할머니의 드레스를 물려 입고 결혼한다는 그런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내게도 있었다니. 우리 부모님 삼십 년의 결혼 생활을 함께 지켜본 귀걸이는 곧 내 결혼식에서 나와 아버지와 함께 버진로드를 걸었다. 내가 필요한 나만의 결혼식, 바로 그 스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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