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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순 Jul 17. 2018

신혼여행


 하루 종일 맛있는 음식을 먹고 태평양 열대 섬의 아름다운 자연을 눈에 가득 담았던 여행을 마무리하는 샤워시간.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봤던 리무진에 잊을 수 없는 바다의 석양까지. 익숙하지 않은 어색한 행복감에 선뜻 꿈인가 싶기도 한 지금 이 느낌. '그래, 신혼여행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은 포근하고 편안한 수증기 사이로 때 아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놓고 간 칫솔이라도 필요한 걸까?


'똑똑똑'

"응? 왜? 뭐 필요해?"

" 어떡하지? 나 그 차에 핸드폰을 두고 온 거 같아."

"뭐?.."


 너무 행복했다 싶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역시 나한테 이런 행복은 너무 과했나. 어제 해변에서 바다 거북을 목격한 신혼부부는 오래오래 잘 산다더니만 이런 대형사고라니. 거북이발이 다 한걸까. 그 차를 운전했던 기사는 연락처도 모르는 데다가 지금은 한밤중 10시. 우리가 투어 했던 업체는 이미 문을 닫고 영업을 종료했을 시간이다. 게다가 이미 우리가 그 리무진을 내린지는 40분가량이 지나버린 상태.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샤워기를 틀어놓고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한참을 굴려대느라 물소리보다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더 클 지경이다.


"내 캐리어에 업체 전화번호 있는데 일단 한번 그리로 전화해봐요. 잠깐만."

"아, 전화 개통을 안 해서 내 걸로는 못 걸지 참... 호텔 전화는 로비밖에 안 걸려요?"


 샤워고 뭐고 편안한 신행의 밤이고 뭐고 더 이상은 1분 1초가 사치였다. 대충 물을 훔치고 옷을 입고 나와 불안함에 사색이 된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니 이건 Suprise, 놀랐지!의 가능성도 없는게 확실하다.


"오빠 전화로 내가 전화해볼까? 우리 같이 탔던 일본인 커플이 혹시 발견해줄지도 모르잖아."

"내가 이미 해봤는데 안 받아. 게다가 내 핸드폰 배터리도 없고. 잠겨있어서 누가 집어도 안을 볼 수 있는 건 아닌데."

"어떡하지. 진짜. 그 안에 어제오늘 우리 찍었던 사진들도 다 있는데."

"나도 모르겠다. 어쩐지 아까 내리는데 내 시계가 진동을 확 하더라. 이제 보니 그게 핸드폰이랑 멀어져서 블루투스 연결이 끊어졌다는 신호였어."

"이 시간이면 그 아저씨도 퇴근했겠다. 우리 이후에 영업이 없었다면 어쩌면 뒷좌석에서 발견 못하고 그냥 내리셨을 수도 있지."

"하아.."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세상을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있는 남편의 얼굴은 정말이지 말로 표현할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손에서 미끄러트렸다는 자책감에 집어삼켜져서 분노와 좌절감에 신혼여행이고 뭐고 전부 잊어버린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서. 복잡 미묘한 마음으로 한참을 고민해봐도 오늘 밤 안에 핸드폰을 다시 찾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도움을 요청할 곳들이 전부 연결이 되지 않는 데다가 우리에게는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휴대폰이 없었다. 개통해온 휴대폰은 잃어버린 남편의 휴대폰이 전부였기에.


"오늘 밤은 무리일 것 같아. 오빠."


 '것 같은 게' 아니다. 그냥 100% 무리였다. 그래도 위로라도 되었으면 싶은 마음에 나는 확신하지 않는다는 듯이 돌려 말했다.


"일단 내일 일찍 일어나서 영업시간 되자마자 그 투어 업체에 연락해서 기사 아저씨 번호를 알아내고 계속 연락드려보자. 오늘 주말이고 시간이 늦었으니까 분명 오늘 우리가 마지막 손님일 거고 내일 그 아저씨가 영업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이야기한다면 아마 차에서 발견하시고 도와주실 거야. 지금 전화해도 안 받는 걸 보면 그냥 차 안에 그 자리에 있는 게 틀림없어."


"그래. 내가 핸드폰 뒤집어 놨으니까 아마 전화해도 빛이 보이거나 그러진 않을걸."

"잊어버려요.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예전에 오빠가 나한테 얘기해줬잖아."

"응.. 근데 나는 그냥... 다른 것 보다도 우리 사진이 너무 속상해. 사진 찍은걸 자동 백업 설정을 해놓은 게 아니라서. 핸드폰 어차피 바꿀 때 된 거라 아쉬움은 없지만."

"어이구. 됐어. 그까짓 거 우리 다른 카메라로도 많이 찍었잖아."


 우리 부부는 지금까지는 거진 크게 싸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여기서 내가 사소한 것 하나 제대로 챙기지 않는다고 지레 화를 냈다면, 아마 우리 부부도 신혼여행은 무조건 와서 대판 싸우고 간다는 사례집에 한 편 더 실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잃어버려서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물건을 두고 후회와 비탄에 빠진 남편을 보면서 나도 덩달아 도무지 어떤 것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무거운 공기에 짓눌려서 여행을 왔다는 사실에 철없이 기뻐해서도 안되었고, 새삼 지난 식사를 돌이켜보거나 사진 찍은 걸 보면서 가볍게 자기 전에 맥주 한 캔 하는 것도 지나치게 가벼웠다. 그래도 피곤했다고 잠을 자기는 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난 남편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 악몽 꾸느라 잠, 한숨도 못 잤어. 간밤에 꿈속에서 계속 핸드폰 찾았다고 두 번이나 연락 와서 찾으러 헤매고 다녔네. "


 정말 소중했던 우리 둘의 사진이 가득했던 핸드폰이었지만, 나는 오늘 찾을 수 있다는 희망에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남편이 안쓰럽기도 하고 답답해서 보고 있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홀랑 잃어버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찾으면 그게 더 편하고 기쁠 텐데. 부디 12시 점심시간이 오기 전에 찾아서 보관하고 있다는 연락이라도 오기를.



"뭐야? 저기 저 리무진. 어제 우리가 탔던 거 아냐? 저기 봐."


 창밖의 커튼을 열던 남편의 목소리 끝이 떨린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남편은 문을 박차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순식간에 방안에 오도카니 남은 내가 할 수 있는 건 남편이 도착할 때까지 리무진이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비는 것뿐이었다. 믿지도 않던 모든 종교의 신들을 마음속으로 전부 불러 모았다. 혹시 내가 너무 행복해서 화가 나셔서 벌을 주고 싶으신 거라면 이젠 뉘우쳤으니 그만해달라고 특별히 comment를 달았다. 만난 건지 아닌 건지 남편이 내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무진은 이내 떠났다. 그 기사인 걸까. 이렇게 이른 시간에도 영업을 하다니.


"만났어?"

"응. 만나긴 했는데. 그 기사는 아니야. 이 아저씨가 그 사람을 아는데 오늘 비번이라고 말은 전해주겠데."

"다행이다. 그럼 모르고 영업하는 동안 리무진에 탄 다른 사람이 집어갈 수도 있는 확률은 없겠네."


 우리가 이곳을 떠나는 비행기는 오늘 밤이다. 일어나자마자 주섬주섬 챙겨 입고 오픈 시간에 맞춰 이곳 미국 통신사를 방문해서 내 핸드폰을 개통할 예정이니, 적어도 오후 5시 전에 문자만이라도 받는다면 신혼여행이고 뭐고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어제 그 기사님께 핸드폰을 받으러 튀어나갈 준비가 다 되어있었다. 연신 괜찮냐고 묻고, 괜찮다고 대답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대화라는 건 그게 전부였다. 가볍게 미소라도 지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어깨를 툭 치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웃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나의 가벼운 어깨 툭은 밤새 얇아진 남편의 가느다란 감정의 선을 틱 끊어버리고 말았다.


"아! 진짜. 제발 이러지 마 좀."

".... 아니 난 그냥 아프라고 한건 아닌데. 아팠어?"


 아팠나 보다. 치사했다. 나도 똑같이 힘든데 그냥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줬으면 했는데. 싸우고 싶지는 않아서 꾹 참았다. 하와이의 아름다운 하늘과 건물 사이로 보이는 해변은 정말 매정하게도 예쁘기만 하구나. 한반도에선 큰 소리 한번 안 내던 우리가 왜. 여기까지 와서. 그래도 신혼여행인데. 그놈의 '신혼여행'이라는 타이틀에 어리광 부리고 싶었던 나 자신이 초라해지기까지 시작했다. 나만 신혼여행인 걸까. 이제 핸드폰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뭐라 말을 꺼내봤자 서로의 감정을 건드릴 것만 같아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게 제일 위험한 행동임을 알면서도.


"그냥, 네가 조금 더 위로해주고 토닥토닥해줬으면 했어. 약한 모습 보여서 미안해."

“응. 나도 알아. 아프라고 때린건 아니었는데 나도 미안해.”

“아쉽다. 이젠 가능성이 없는거겠지?”

“일단 천천히 오늘 남은 시간 근교를 즐겨보자. 우리 맥주도 남았으니 해변에 누워서 어제 못잔 낮잠이라도 자는게 어때?”


 편안히 잘 수 있을리가 없겠지만 말이다.


 간밤에 마시지 못하고 남은 코나 맥주를 들고 와이키키 비치 해변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볼 때에도, 하와이에서 제일 유명하다던 도넛 집에서 갓 나온 도넛을 한입 베어 물 때에도, 파인애플 농장에서 사탕수수 음료수를 들이키며 열대식물 밑에서 소나기를 피할 때까지도 기사 아저씨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두시가 넘어서야 남편은 핸드폰을 포기하고 내려놓았다. 그때쯤은 한결 편해진 얼굴로 다음 핸드폰을 뭘로 사용할지 고민에 빠지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장소가 바뀔 때마다 수시로 기사님께 메시지를 남겼지만 렌터카를 반납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공항에서도 결국 아무런 회신은 받지 못했다.




 비행기를 타고 하루가 지났다. 경유지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의자에 앉아 마지막 전화를 떨리는 손으로 걸던 나는 전화연결에 또 실패했지만, 이내 우리는 기다리던 메시지를 받았다.

 Aloha. 어제 저도 핸드폰을 분실해서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핸드폰은 찾아 놓았습니다. 제가 투어 사무실로 가져다 놓을 테니 연락 주셔서 안내받으시면 됩니다. 좋은 추억 오래오래 남겨두시고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Mahalo.

 감사합니다를 세 번 말하면 이틀간 우리가 느꼈던 모든 심정이 1g이라도 전달이 될까. 이렇게 쉽게 문자만 하나 일찍이 보내주셨어도 어제 하루가 좀 가벼워졌을 텐데. 남편과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고 한 편의 드라마를 찍으면서 우리는 단단해졌다. 이제는 그 무엇도 잃어버리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면서. 이제 집에 돌아가서 핸드폰을 택배로 돌려받기만 하면 우리의 소중한 사진들도 전부 무사했다. 정말 끝났다. 해냈다. 죽어가던 하와이에 대한 감동도 이제야 다시 되살아나서 찝찝했던 기분을 씻어내고 비로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었다. 경유를 해야 하는 힘든 여정에 짐이 너무 많고 무거웠던지라 긴장이 다 풀려버린 나는 그날 저녁, 안마의자에서 남편보다 먼저 그야말로 떡실신을 했다. 입 벌리고 침 흘리며 승리의 하와이를 만끽하는 모습은 남편이 두고두고 우울할 때마다 볼 수 있는 여정의 final cut으로도 손색이 없었던 모양이다.






거짓말 같은 에피소드 하나 더.


 핸드폰은 이제 집에서 멀리 하와이로부터 날아오는 택배를 받기만 하면 된다. 미국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것저것 가전제품이 필요했던 우리는 주말을 맞아 미국의 Hi마트, Best Buy를 찾았다. 오늘 일정은 이걸 사고, 행복한 기분으로 새로 이사 갈 집을 청소하는 상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클리어. 원하던 슈퍼파워의 청소기도 얻었고, 남편과 기분 좋은 드라이브를 마치고 집 앞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사는 빌리지의 단지 내 주차장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보안 카드키가 필요하다.


"지갑 좀 꺼내 줄래?"

"응? 나 안 가지고 있는데? 나 안 줬어."

"뭐?.."

"진짜야. 나 없는데."

"그럼 어디 간 거지?"

".... 잃어버린 거야? 헉."


 하와이에서 남편의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나서 내 핸드폰을 개통하기 위해 찾았던 통신사의 직원이 "우리는 돈 있으면 다되. WELCOME TO AMERICA."라고 말했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게 불과 며칠 전이다. 그 돈이 있으면 다 되는 아메리카에서, 돈 안 주면 지나가다가도 권총 맞을 수 있는 아메리카에서, 이번엔 '지갑'을 잃어버렸다. 땅에 흘린 걸까. 제발 제발 트렁크에서라도 나와주길. 내가 또 지나치게 행복했나 보다. 그래서 벌을 주나보다. 맙소사. 제일 중요한 것 두 가지를 연달아 잃어버리다니. 남편이 내가 이곳에 오고 나서 알게 모르게 부담이 컸던걸까.


"일단 찾아보고 없으면 다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아, 정지부터 해야지 카드 정지. 어떻게 하지?"

"아, 그 카드..."


 남편도 복잡한 마음에 멀티태스킹이 안됬는지 내 질문에 대한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나는 하와이 때보다 더 공황상태에 빠졌다. 애초에 주말이라 한국처럼 전화한다고 재깍재깍 받아주는 24시간 고객센터도 전화 한번 걸기가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데다가 돈에는 끔찍하리만큼 냉정한 이곳은 누군가 지갑을 주웠다고 하더라도 비싼 가전제품 파는 마트 앞에 놓인 지갑이라면 얼싸 좋다 하고 단번에 몇백 달러의 가전제품을 긁어버릴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잃어버린 건 잃어버린 것이다. 말해서 뭐하나 싶어 나는 가전제품 마트의 전화번호를 급하게 찾기 시작했다. 대학시절 6개월의 교환학생의 경험은 있지만, 아직도 외국인과 대화를 하기 전이면 가슴이 두근두근해서 알던 말도 막혀버리는 나, 지갑 분실에 대한 공포가 그 두려움을 이겨낸 건지 어설픈 발음으로 긴급히 마트에 분실신고를 접수했다. Wallet의 발음을 못 알아듣는 직원을 위해 친절히 credit card라고 설명해주면서. 멍청하게 말을 먹어대는 내 혀가 끔찍이 원망스러웠지만, 어쨌든 새는 구멍 하나는 막은 상태. 남편은 그동안 온라인으로 모든 카드 사용을 정지시켰다. 다행히 그때까지도 새로운 사용내역은 없었다. 면허증을 비롯해 남편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그 지갑에 들어있다. 핸드폰처럼 다 잊어버리고 새 걸로 갈아 끼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일단 다시 그 마트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괜찮아. 괜찮아. 카드 사용내역 하나도 없는 것만으로도 그게 어디야. 우리 복 받은 거야. 현금도 얼마 안 들어있고 면허증이야 다시 재발급받으면 되지 뭐. 괜찮아."

"핸드폰 때 한번 경험이 있어서 그런가 그렇게 당황하지는 않네 오빠."


 나는 될 수 있는 한 끊임없이 재잘댔다. 핸드폰 때처럼 어리숙하게 숨 막히는 공기를 만들 수는 없었다. 이것도 무슨 하나의 신고식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나한테 이렇게 초특급 긍정모드가 있었다니.


"아, 정말 나 왜 이렇게 멍청하지. 어떻게 두 개를 다 잃어버리냐 한 번도 아니고. 게다가 그 지갑 지난번에 네가 선물해준 소중한 건데."

"됐어. 그런 선물을 백번도 더 해줄 테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


 핸드폰 때에 비해서 그래도 남편은 부드러웠다. 이 상황에 대해 웃을 수 있는 여유도 있었다. 우리 둘 다 아마 한 번의 경험을 통해 면역이 생겨 서로에게 불필요하게 모난 말은 하지 않았다. 돌아간 마트 주차장에도, 카트 안에도 그 어디서도 남편의 지갑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대로 속상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우리는 그런대로 그 상황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냥 단지 물건을 많이 사느라 실수로 떨어뜨려 챙기지 못했을 뿐이다.




“결혼하고 나서 제일 달라진게 뭐야?”

“음.. 책임감의 무게가 더 커졌다는거?”

“그래? 그런가. 그런데 오빠, 나 한가지 부탁이 있어.”

“응? 뭔데?”

“여기 오고나서 오빠가 혹시 나를 먹여살려야 할 큰 부담으로 생각하는거라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도 충분히 저축해둔 것도 있고 곧 내가 가야할 길도 찾을거야. 그러니까 소울메이트, 친구가 하나 같이 산다고 생각해주면 안될까?”

“크크, 그래.친구야.”


 지난밤에 침통에 빠져 맥주와 감자칩을 함께 하루를 마무리했으니, 오늘은 오전에 둘이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 남편은 지갑에 대해서 많이 잊어버린 눈치다. 그래도 핸드폰 때처럼 밤을 홀랑 지새우지는 않았으니까.


"이게 뭐지? 쓰레기통을 집 문 앞에 누가 옮겨놨네?"

"응? 바닥에 무슨 노란 봉투가 있어."

"뭐야? 발신자도 없고 우편물은 원래 관리사무소에서 받아주는 거 아닌가? 무서워. 조심히 열어봐."


 섬뜩하게 노란 봉투가 나는 무슨 탄저균이라도 들은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면 광고지인가.


"어.. 어? 어?! 지갑이다! 엇! 뭐야!!"

"응? 헐. 대박. 그게 왜 여깄지? 편지야 그거?"

"우와. 이거 뭐야 진짜. 돈도 하나도 손 안 댔고 그대로 다 있어. 와... 진짜... 정의는 살아있네."

"아, 나 소름 돋았어. 이 사람 미쳤나 봐 진짜."


 I found your wallet on the pavement in the parking lot near BESTBUY. As no phone # or email I couldn't call so am dropping this off! -Nancy
 네 지갑을 BESTBUY 주차장 근처에서 찾았어. 안에 전화번호도 이메일도 없어서 연락은 못했네. 그래서 여기 놓고 간다! -낸시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 고무신님 감사합니다. 낸시 당신은 천사예요. 천사가 틀림없어. 남편은 낸시에게 감사를 표하는 메시지와 함께 사례금을 드리겠다고 문자를 보냈으나, 낸시는 덕분에 남편과 함께 주말에 좋은 근교를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며 필요 없다고 답장했다.


"정말 천사가 따로 없네. 이럴 수가."

"이런 천사들도 많은데 이 나라는 왜 그렇게 허구한 날 총기사고가 일어나는 거지."

"그나저나 우리 액땜 정말 제대로 했다. 단기간에 제일 귀중한 두 가지를 다 잃어버렸는데 두 개 다 찾았어. 기적인가."

"웃을 수밖에 없다. 정말. OH YEAH!"


 두 번 모두 참으로 정신없는 사고였다. 두 번 모두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버텨냈다. 우리 둘 다 서로 참 잘 믿고 의지해줬다. 사소한 사고에 '이 결혼 취소야!'까지의 사태까지는 가지도 않았다. 어떤 사고가 생겼을 때 부부가 둘이 함께 솔루션을 찾는다는 게 어떤 건지 조금의 예행연습은 되지 않았을까? 덕분에 지금 남편은 지겨울 정도로 나의 "지갑, 핸드폰, 차키." 소리를 듣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 부부생활, 꽤 파란만장해서 기억에 남을 만한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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