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이셨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엄마와 아빠는 어린 시절부터 내게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당당한 커리어 우먼으로 살아도 나쁘지 않다고. 어린 마음에 커리어 우먼이 어떤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크면 커리어 우먼이 될거라고 하고 다녔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에는 '비혼'이라는 개념이 유행처럼 번졌다. 사회적으로 나이가 차도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로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주변의 너무 많은 친구들과 친척들, 회사 동료들이 결혼하면 비참해진다며 저마다 한마디씩 보태서 구체적으로 그게 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나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결혼은 하지 않고 살아야 시대에 뒤쳐지는 여성이 되지 않는 것인줄로만 알았다. 그래도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꼴에 연애는 해보고 싶었지만.
그렇다. 나도 내가 누군가의 '와이프'가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냥 어떤 사람을 사랑했고, 그 사람이 없이는 인생이 외롭고 추울 것이라 생각했을 뿐인데. 이 사람을 만나기 전에 무미 건조하게 다니던 회사는 주말에 있을 데이트를 위해 돈을 버는 곳이 되었다. 오랜시간 외롭게 지내왔던 제게 첫 연애는 달콤하기만 했다.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도 고독한 자기개발의 늪에 빠져있었을 것이다. 결혼한다고 해서 이루고 싶은 것들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결혼해도 그 놈의 '커리어 우먼'은 할 수 있는 거라고 믿었다. 겁이 많아서 책임지고 싶지 않은 성격과, 욕심이 많아서 둘다 가지고 싶은 마음 탓에 심한 결정장애가 있는 내가, 그래서 주변 사람들 힘들게 하는 그런 내가 어떻게 망설임 하나없이 결혼을 강행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대학시절에도 남자친구 하나 못 사귀어 봤는데 그 새 남들 한다는 장거리 연애도 해보고 남편이 본격적으로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는 데이트도 잔뜩 해봤다. 그러다가 헤어지기 싫어서 영어를 배워보겠다는 핑계로 직장을 때려치고 여기에 와버렸다. 여태 할 줄 아는 음식은 라면뿐이었는데, 미국에 와서 새 보금자리를 꾸렸을 때는 된장찌개 끓이는 법을 알려줄 엄마조차도 너무나 멀리 있었다. 경제신문 대신 난생 처음 요리 유튜브를 구독했다. 언젠가 이곳에서의 생활이 적응되고 나면, 저도 학생이 되든 직장인이 되든 어떤 직업을 갖게 될테지만, 아직 아무런 타이틀이 없으니까 요리는 집에 조금이라도 붙어있는 제가 하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어떻게든 하고나면 맛있게 먹어줄 사람을 지켜보는건 꽤나 뿌듯한 일이었으니까.
인터넷에서는 결혼하고 완전히 돌변한 남편, 남편의 새 여자, 와이프를 노예처럼 부려먹는 남편 이야기가 그렇게나 많았었는데 다행히도 남편은 그런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까지도 청소와 설거지정도는 도맡아 해주고 있는데다가 지금까지 이런 웃음 없이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사소한 일들로 나를 웃겨준다. 지금까지 결혼했다는 사실을 남편 때문에 후회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행복이란게 이런거구나 싶었다.
남편은 가방 끈이 길다. 신기할 정도로 공부, 아니 연구를 좋아한다. 내가 승진을 위해 억지로 자격증을 따고 버티고 참아내면서 공부를 해왔다면, 남편은 정말 순수하게 재미있어서 공부를 계속 해온 사람이다. 당연히 여기서 만난 남편의 학교 친구들도 가방 끈이 길었다. 그 분들이 모두 남편처럼 공부를 게임처럼 하는 분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타국 땅에서 유일하게 내 모국어로 친해질 수 있는 몇 안되는 분들이었다. 몇번의 식사를 즐겁게 같이 했다.
"조금 있으면 어학원 다닌다고 하셨지요?"
"아 네, 이제 일주일도 안 남았네요."
"근데 그거 아세요? 거기 가면 막 같은 유학생 와이프들끼리 남편 논문 실적으로 경쟁하고 그런다던데."
"...네?"
"언니도 며칠안되서 막 그러시는거 아니에요? 오빠가 열심히 하셔야겠네요.ㅎㅎ"
".........."
그 친구의 말은 뭔가 이상했다. 분명히 '내가' 어학원을 다닌다고 했는데 왜 남편 실적으로 경쟁을 한다고 하는 걸까. 마침내 또래들을 만나서 함께 Inspired되고 열정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아, 그런가. 이제와서 보니 내가 착각을 했던 모양이다. 마치 남편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유학생이 되어서 이곳에 온 줄 알았다. '~의 와이프'라는 타이틀 밖에 없었던 내게 나를 내 자신으로만 봐주길 바랬던 마음 자체가 사치였었던걸까. 결혼하고 나서 처음으로, 무력감을 느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 무력감에서 벗어나려면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나를 압도하기 시작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