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엄마 생일 나기

(feat. 소고기, 홍합, 그리고 미역국)

by 권경덕


엄마 생일이어서 오랜만에 집에 갔다. 동생한테 미리 연락을 했다.


- 나는 미역국+케익+와인 세트로 준비할 수 있는데, 너는 뭐 준비할래? 나눠서 해도 되고.


백수 신분이라 따로 선물이나 용돈을 준비할 여유가 없었던 나는 가벼운 주머니 사정으로 할 수 있는 자잘한 성의들을 긁어 모아 무려 '세트'라고 칭하며, 그럴듯한 포장지를 씌웠다. 동생이 가는 길에 케익을 사겠다고 해서 알겠다고 했다. 와인은 선물받은 걸 가져가서 같이 마시려고 했는데, 싱크대 위에 두고 나온 와인이 떠오른 건 이미 지하철을 탄 후였다. 결국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할인중인 와인을 한 병 사갔다.


집에 도착하니 저녁 식사 장소는 집 근처에 새로 생긴 소고기 집으로 정해져 있었다. 고깃집에 가서 메뉴판에 적혀 있는 소고기 1인분 가격을 보고 얼마 전에 마트에서 본 돼지 목살 가격이 떠올랐다. 이 돈이면 집에서 몇 끼 연속으로 돼지 고기를 밥상 위에 올릴 수 있는지, 머릿속 회계 파트에서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지난 번 독서모임에서 읽었던 '고기로 태어나서_한승태' 라는 책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 책은 우리가 먹는 동물이 어떤 환경에서 길러지고 유통되는지 저자가 직접 축산 농장에서 일하며 쓴 책이다. 저자가 묘사한 처참하고 참혹한 환경속의 동물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래도 그 책에 등장하는 동물이 닭,돼지,개 뿐이어서 오늘의 메뉴가 소라는 것이 조금 안심이 되었고, 안심하는 스스로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엄마의 소고기 생일 밥상은 얼마 전부터 돈을 많이 벌기 시작한 동생이 계산했다. 카운터에서 카드를 건내는 동생의 손놀림이 꽤나 우아했다. 그렇게 보였다.


- 자알~먹었습니다.


나는 멋쩍게 딴 데를 보며 아우님께 인사를 했다.


사실 엄마 생일은 이틀 뒤다. 가족이 여유롭게 모일 수 있는 날로 밥 약속을 잡다보니 일요일 저녁에 만나게 된 것이다. 집에 가서 케익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이고, 노래를 불렀다. 와인을 한 잔씩 하고 약간 오글거리는 덕담을 주고 받으며 조촐한 생일 파티를 마무리했다. 아빠는 껄껄 웃으며 애들이 다 커서 알아서들 준비하니 좋다고 했다.


- 엄마 선물은 아빠 몫으로 남겨뒀지. 엄마 기대해!


소고기를 산 동생이 말했다.


다음날 나는 늦잠을 잤다. 아빠와 동생은 일찌감치 출근했고, 엄마는 약속을 나갔다. 잠이 살짝 깨서 서서히 정신이 드는 몽롱한 기분이 좋아 한동안 이불 속에 머물렀다. 그러다 허리가 좀 땡긴다 싶을 때쯤 이불을 걷어 찼다. 매일이 휴일같은 '브라보 마이 백수 라이프'를 속으로 외치며 침대 밖으로 나왔다. 이 정도면 킨포크같은 라이프스타일 잡지에 한 번쯤 소개 될만도 하지 않나, 하는 뻔뻔한 생각을 하며 집을 어슬렁거리는데 거실에서 나와 비슷한 몰골의 다른 존재와 마주쳤다. 7년째 여기서 살고 있는, 성격 까칠한 고양이 녀석이었다. 이름은 다미. 나만큼이나 잠이 많은 그 녀석도 좀 전에 깼는지 눈이 반쯤 감긴 얼굴로 어슬렁거린다. 그러다 자기 밥그릇 쪽으로 가더니 얼굴을 파묻고 아침 요기를 한다. 그 모습을 보고있으니 내게 남은 미션 하나가 떠올랐다. 내일 아침 밥상에 미역국을 무사히 올리는 것. 나는 오늘 자취방으로 돌아가야 하니 미리 끓여놔야 했다. 옷을 주섬 주섬 입고 재료를 사러 마트에 갔다. 얼마 전에 홍합 미역국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으로, 홍합을 찾았으나 홍합이 없다. 아쉽다 홍합. 홍합. 어쩔 수 없이 또 소고기를 선택했다. 어제는 구이로, 오늘은 국거리로.


미역국 끓일 때마다 기겁하게 되는 건 미역의 무시무시한 자가증식력 때문이다. 말린 미역의 앙상함에 속아 몇 줌씩 더 넣으면, 물 먹고 미친듯이 불어난 미역과 마주하게 된다. 그 큰 냄비를 빈틈없이 점령한 괴물 미역의 의기양양함에 기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물먹은 미역의 기괴한 모습을 목격했지만, 미역 위주로 우걱 우걱 먹어야지 뭐, 하며 쿨하게 조리를 시작했다.



재료 : 들기름 적당히, 소고기 한봉지, 미역 어느정도, 물 넉넉히, 국간장 조금, 까나리액전 약간


1. 들기름을 냄비에 두르고 소고기를 볶는다.

2. 미역을 넣고 계속 볶는다.

3. 물을 넉넉히 넣고 푹 끓이다가 중간에 다진 마늘을 넣는다.

4. 국간장과 까나리액젓을 적당히 넣고 다시 푹 끓이다.

5. 푹, 아주 푹 끓인다.



미역 위주로 한 그릇 떠서 밥을 말아 먹었다. 음, 괜찮군. 폰 카메라로 냄비에 담긴 미역국을 황금 각도로 한 장 찍고 뒷정리를 시작했다. 식탁을 닦고, 설거지를 하고, 행주를 빨아 널었다. 가족들이 아침을 먹고 싱크대에 쌓아 놓은 설거지 거리들까지 말끔하게 해치웠다. 같이 살 땐 안그랬는데, 가끔씩 방문하는 외부인이 되고부터는 뒷정리를 말끔히 해놓고 가는 습관이 생겼다. 독립하고 가족들과 남은 아니면서도 약간은 남같은 관계가 되면서부터 조금씩 예의를 배워가고 있다. 당연하지만 당연한줄 몰랐던, 주로 집안일과 관련된 예의를.


미션을 마치고 집에 갈 준비를 했다. 옷을 챙겨 입고 가방을 매다가 식탁 위에 앉아 나를 째려보고 있는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다가가서 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려고 손을 슬쩍 내미는 순간, 앞발로 내 손등을 탁 갈긴다. 얘랑은 너무 남같아서 좀 그렇다. 현관문 앞에서 가족 채팅방에 미역국 사진과 메세지를 남겼다.


- 미역국 끓여놓고 갑니다! (생색) 가족들 같이 맛나게 드셔!


엄마에게 답장이 온다.


- 아궁~~ 맛나겠당 고마워~ 어제 고기포식하구 오늘은 미역국으로 포식! 행복하네^^


흠, 이정도면 백수여도 최소한의 사람 구실은 한 건가? 내가 보낸 카톡 메세지 옆에 뜬 숫자가 다 사라지고도 아빠와 동생은 답이 없다. 일하는 사람들이니 이해한다. 이 땅의 바쁜 풀타임 노동자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내일 아침을 미역국으로 시작할 엄마와 식구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나의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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