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여덟에 집을 나왔다. 부모님 집은 서울이었다.
서울에서 서울로 독립했다고 하면 의아하게 보는 사람도 있다. 뭐 때문에 집 나가서 쓸데없이 돈을 써? 내게 독립은 쓸데없는 지출이 아니라 꼭 필요한 선택이었다. 나는 나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독립하지 않았다면 부모님과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 수도 있었다.
여느 부모와 같이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해서 아침에 넥타이 메고 출근하는, '번듯하고', '멀끔한' 사회인이 되길 바라는 부모님(아빠는 은근히, 엄마는 노골적으로)은 각종 대기업, 공기업, 공무원 채용 정보를 뉴스레터처럼 보내왔다(이건 엄마). 넥타이가 싫고, 주 5일 나인투식스로 일하는 것이 싫고, 불안정하되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은 내게 부모님(역시 엄마)의 뉴스레터는 스팸정보처럼 계속 쌓일 뿐이었다.
부모님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나에 대한 기대가 지나쳤다. 나쁜 사람과는 씩씩하게 싸울 수 있지만, 기대하는 사람과 싸우면 상처가 남는다. 나는 부모님이 기대하는 안정적이고 따분한 삶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미성숙하고 방어적인 내 입에서 쏟아지는 뾰족한 말들로부터 부모님을 보호해야 했다.
집은 가볍게 나왔다.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고 말하고 단촐하게 배낭을 싸서 고시원에 들어갔다. 며칠 뒤 부모님께 통보했고, 부모님은 놀라셨지만 잠깐 저러다 들어오겠지 하셨다.
독립한 이후부터 줄곧 세입자였다. 임대차 계약의 세계와 만나면서 월세는 내 삶의 필요조건이 되었다. 집주인의 계좌번호는 내 한 달치의 삶과 긴밀해졌다. 월세 이외에도 내가 무상으로 받아온 것들이 모두 내 몫이 되었다. 가스, 전기, 수도세 고지서를 처음 본 건 아니지만, 노란색 종이 위에 적혀 있는 금액과 은행 계좌 번호를 꼼꼼히 확인하며 마음 졸이는 일은 내 몫이 되었다. 집주인과 실랑이 할 때, 이웃과 마찰이 있을 때 위축되는 마음을 추스르는 일도 내 몫이 되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구나, 하며 부모님의 소중함을 깨닫고 철없이 집을 나온 스스로를 반성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다시 본가(本家)로 들어가 부모님과 눈물로 재회하는 '돌아온 탕자'가 되지는 않았다. 계속 집 나간 탕자로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부모님과 유지하고 있는 적정 거리가 우리 모두를 보호하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고, 내가 스스로 자립하며 살아가는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몇 번의 이사를 거쳐 어쩌다보니 지금은 부모님과 이웃으로 지내고 있다. 부모님 집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떨어진 사회 주택에 작년부터 살고 있다. 부모님과는 일주일에 한 두번씩 함께 식사를 하며 서로의 안부를 가볍게 확인한다. 요즘 엄마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공부하고 있고 아빠는 테니스 클럽에 들어가 늦깎이 회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나는 프리랜서 독서 모임 강사 일을 하며 불안정함과 자유로움 사잇길 어디쯤을 걷고 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라는 무미노 츠나미의 만화가 있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제목 만으로도 심금을 울린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거나 견디는 게 좋다. 하지만 나는 피할 수 있는 길을 찾았고 피하는 길을 택했다. 적절한 타이밍의 줄행랑은 최악의 상황을 면해주기도 한다. 도망치는 건 도움이 되었고, 부끄러움은 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