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과 맞물려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리면서 우리나라는 키오스크나 태블릿과 같은 무인 시스템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율이 가파르게 증가했다. 코로나19 이전에 기술이 없어서 도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대인 시스템에서 굳이 무인 시스템으로 갈 필요성을 못 느꼈고, 그것을 도입하며 난리부르스를 치는 그 시행착오를 겪을 바에야 다소 낮게 책정된 최저시급으로 부려 먹을 수 있는 인간의 노동력이 여러모로 기계를 능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2018년 아마존에서 AI 시스템을 도입하며 약 2천 명 정도 대거 인력을 정리한 것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차일피일 뒤로 미루고 있다가 (법의 문제도 있었지만) 코로나19 시대에 접어들면서 원하든 원치 않았든 도입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지금의 스스로 주문하고, 스스로 물건을 가져오는 형태가 많은 영역으로 퍼졌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겠지만 현재 2025년 기준 시간당 최저시급은 10,030원으로 책정되어 있는데, 옛날의 서비스만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확실히 높은 금액으로 책정되었다고 생각한다. 키오스크 하나 들여놓는 것만으로 직원이나 아르바이트생이 하는 소위 ‘감정노동’이란 것은 예외사항으로 된 듯도 해서다. 예전엔 손님과 대면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만큼 거기에 어찌할 수 없이 따라오는 불협화음과 감정의 소모는 불가피한 요소였는데, 이제는 키오스크로 대체되면서 굳이 그래야 할 필요성 자체를 못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주문은 키오스크로, 자신은 그저 손님이 주문한 음식만 제대로 내놓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 상황에서 무인 시스템을 사용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의 불편함은 더 이상 직원이나 아르바이트생의 몫이 아니다. 예전에는 보통 곤란을 겪어야 하지 않을 주문의 영역은 이제 온전히 손님의 몫으로 넘어갔다. 손님의 역량에 따라 손님이 얻을 수 있는 서비스는 제한된다. 실제로 어떠한 패스트푸드점에서 어르신이 진땀을 흘리면서 할 줄 모르는 키오스크에 서 있는 것을 보고서도 누구 하나 말 걸지 않고 있는 것을 봤다. 손님도 적어서 직원과 아르바이트생이 모여서 잡담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바로 그 앞에서 어르신들이 곤란해하고 있음을 모를 리 없었으나 일하는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내가 나서서 그분의 주문을 도와드렸고, 마치 그걸 기다렸다는 듯 몇 분이 도움을 요청했다. 덕분에 나는 그분들의 주문을 모두 도와주고 나서야 내가 먹을 햄버거를 주문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가 좋은 서비스를 받았다고 느낄 때는 결국 ‘내가 움직이지 않고서도 일이 해결될 때’라고도 정의할 수 있다고 본다. 내가 몸소 움직여 물건을 알아보고 골라 직접 결제를 하고 물건을 들고 가는 형태와 매장에 딱 들어갔더니 직원이 앉으라 하고 커피 한 잔을 내주면서 필요한 품목을 대신 찾아드리겠다고 하며 결제와 배송마저 그 쪽에서 일사천리로 해결해 줄 때 우리는 어느 쪽에 더 좋은 서비스라고 생각할까. 명백하게 후자일 것이다. 서비스는 결국 누군가에게 케어를 받는다는 것과 비슷하다. 덜 신경 쓰면서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을 마다할 사람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전의 우리나라 인간 노동력의 측정이 얼마나 헐값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적은 돈으로 이것저것 모두 다 해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노동력 착취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그 적은 돈으로 좋은 서비스를 해 줘야 했으니 말이다. 그 기준으로 보면 지금은 그 좋은 서비스가 일부 제외됐음에도 시급은 오른 셈이다(물론 옛날과 지금의 물가 차이를 차치하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결국 인간의 노동력의 고유 가치는 상실한다. 인간이 기계보다 나은 것은 인간만이 줄 수 있는 융통성과 섬세함일 것인데, 그것을 제거한 이상 굳이 휴식도 줘야 하며, 손님과의 감정노동은 줄었어도 고용주와 노동자 간의 감정노동이 줄어들지 않은 상황에서 고용주는 굳이 인간을 쓸 필요가 없다. 초기비용이 비쌀 뿐, 이후에는 인간과의 쓸데없고 소모적인 그 모든 것이 제거될 수 있는 무인 시스템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혹자는 그런 좋은 서비스를 원하면 더 비싼 돈을 내라고 할 수 있다. 최저 시급 10,030원도 아직도 부족한데 감정노동까지 해야 하냐며 비난할 수도 있다. 그렇다. 결국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셀프’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고용주 입장에선 마냥 무인 시스템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그게 손님 입장에서 편할 때도 많다. 예전에 음식점에 들어갔는데 아르바이트생이 주문판을 약간 던진 다음에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고선 퉁명한 말투로 “그래서 뭐 드실 건데요?“라고 했었다. 그때 전원이 벙쪄서 순간 아무 말도 못 했었다. 이런저런 정황상 그 불친절함의 극치를 참고 주문을 하고 먹었지만 그 이후로 거기에 있던 사람들 전부 그 음식점은 쳐다도 안 봤다. 고용주 입장에서야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 한 번 겪으면 안 가는 사람은 죽어도 안 가는 법이다. 차라리 그런 사람을 고용할 바에야 키오스크나 태블릿 주문이 영업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간과 기계는 각자의 노동력의 가치에 대해서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노동력 고유 가치를 거절하면 거절할수록 무인 시스템은 더더욱 도입될 것이고, 인간의 설 자리는 애매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좋은 서비스를 받기 위하여 우린 이제 더욱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이제 서비스도 점점 부익부빈익빈이 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