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쇼핑을 하기 전에 배가 고파서 분식점 같은 곳에 들렸다. 그곳은 모든 것이 셀프로 되는 곳이었다. 주문도 키오스크로 해야 했고, 반찬과 물 같은 것도 내가 가져와야 했으며, 주문번호가 뜨면 내가 음식을 가져와서 다 먹으면 반납해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요즘에 이런 곳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나는 셀프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쨌든 주문한 떡볶이와 돈까스가 나왔고, 막 먹으려고 할 때쯤에 어르신 한 분이 들어오셨다. 마침 점원이 나와 있었고, 그 어르신은 우리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서 5천 원을 주면서 “김밥 하나만 부탁해요”라고 했다. 다행히 그 점원은 익숙하듯이 그 주문을 받았다. 그 모습을 보며 다행이다 싶었다. 왜냐하면 이런 시스템으로 되어 있는 경우엔 정말로 키오스크 외엔 전혀 주문 안 받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손님 한 명이 없어도 무심하게 “키오스크에서 주문해 주세요” 하고 손님을 거들떠도 안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는 정말로 이 시스템을 좋아하지 않는다.
가게가 그리 크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그 어르신과 우리의 테이블 간격은 한 20센티 남짓했다. 그래서 뭘 먹는지, 무슨 대화가 오고 가는지, 뭘 하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알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어찌할 수 없이 그 어르신이 더더욱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김밥 딸랑 한 개를 놓고서 물을 마셔 가면서 천천히 드시는 모습 말이다. 앞서 말했지만 여기는 온전히 손님이 스스로 움직이는 곳으로 점원이 이렇다 하게 손님을 위해서 서비스해주지 않는다. 단무지도 없고, 흔한 장국도 없이 그냥 드시는 모습이 영 맘에 걸렸다. 사실 나 역시 장국이 있는지 몰랐다가 주변에서 먹는 것을 보고 눈치껏 장국을 떠다 마셨다.
어르신은 다른 사람들이 먹는 것을 알고 있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포기하셨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엄마도 태블릿으로만 주문해야 하는 음식점 가면 진땀이 난다고 하고, 어쩔 땐 아예 뒤돌아서 나온다는 말을 하신다. 어쩌다가 말을 나누게 되는 어르신들도 음식점 하나 들어가는 것이 곤욕일 때도 있고, 그런 것 하나하나 묻는 것이 젊은이들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질문 자체를 포기한단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오지랖인 것을 안다. 참고로 나는 그리 착하거나 배려 깊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최소한 이런 것은 아니지 않나 싶다. 그래서 나는 “어르신, 괜찮으시면 단무지라도 좀 갖다 드릴까요? 아님 다른 것이라도... “라고 말했다. 뜬금없는 내 말에 앞에서 먹고 있던 엄마도 놀랐고, 그 어르신도 놀라셨다. 어르신은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아요. “라고 답하셨다. 그 반응에 나는 ‘역시 괜한 오지랖을....’이란 생각이 스쳤다. 그런데 그다음에 “배려해 줘서 고마워요. 아가씨가 마음이 따뜻하네.”라고 해 주셨다. 그 말에 겸연쩍어서 “아닙니다. 맛있게 드세요.” 하고 나도 음식을 계속 먹었다.
근데 음식을 먹는 중간에 어르신이 계속해서 “고마워요. 배려심이 있네.”라고 말하시는 게 아닌가. 사실 살짝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계속 “아닙니다.” 하면서 먹었다. 먼저 왔던 만큼 식사는 우리가 먼저 끝나서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어야 했는데 가는 그 순간에도 “고마워요. 배려해 줘서 고마워요.”라고 하셨다. 나는 앵무새마냥 ”아닙니다, 맛있게 드세요 “라고 했고, 엄마도 아니다 싶었는지 ”어르신 맛있게 드시고 가세요~“라고 붙였다.
누차 말하지만 나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사회는 사람지향적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AI가 발전하고 있다. 많은 인력이 자동화 시스템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제 그림이나 음악마저도 AI가 만들어서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심지어 사람보다 낫기까지 한다. 하지만 모든 기술의 발전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만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소외시키고, 단절시키기 위해서는 아니라고 본다. 날로 높아져 가는 인건비와 점점 개인주의화 되어 가며 사람들과의 마주침을 꺼리고, 심지어 친구들끼리도 통화하는 게 싫다고 하는 세상이긴 하지만 여전히 사람은 사람을 그리워하고, 사람의 관심이 필요하고 고픈 법이다.
그리고 분명 대체될 수 없는 사람과 사람의 영역이 존재한다. 아무리 시스템이 셀프였다지만, 점원이 있다면 좀 더 신경 써 줘도 좋은 것 아닐까. 어르신보다 태블릿에, 키오스크에 익숙한 나도 버벅거리기 일쑤다. 며칠 전에 간 음식점에서도 태블릿으로 주문해야 하는 곳이었는데, 음식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이 없다 보니 두 번이나 점원을 부르며 음식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묻고 나서야 태블릿으로 주문을 마쳤다. 중간에 무료로 받을 서비스도 있었는데, 그것을 또 알지 못해서 주문을 안 하고 있으니 보다 못해서 그걸 챙겨준 것도 결국 점원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점원이 주문을 받았더라면 덜 수고스러웠을 것이라 생각했고, 이게 과연 올바른 사회의 모습인가 싶다.
계속해서 사회가 이런 식이라면 결국 이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도태될 것이고, 사회의 주변부를 밀려날 것이다. 누군가는 사회가 변하는데 따라가지 못한다면 도태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경우는 얼마든지 서로 조금의 관심과 신경으로 함께 손 잡고 나아갈 수 있는 영역이라고 본다. 그것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사람지향적이며, 사람답게 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 않을까. 그리고 내가 언제까지 이 사회의 발전에 함께 움직이며 도태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가.
아무리 개인주의화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위로받는 게 사람이다. 모든 시스템은 인간친화적이어야 하며, 사람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쪽으로 발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서 변화된 사회의 적응성을 말하는 것도 안 맞다고 본다.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결국 도와주는 건 내가 알든 모르든 그 존재는 결국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다. 그런 걸 생각하면 좋겠다. 물론 좀 귀찮고, 성가신 일이 생길 수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