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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동이 Sep 20. 2020

#9 아들에서 아버지로

아내 임신 15W, 임신 후에 변하는 것




결혼 후 지금까지 두 번의 문화 충격을 받았다. 웨딩 페어와 베이비 페어.

스/드/메로 시작해서 육아 템으로 이어지는 비포장 언덕길 가운데 누구나 한 번은 거쳐야 하는 관문이자 성지.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업체와 소비자가 만나는 공간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여러 옵션을 한 자리에서 비교, 분석하고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가성비 있는 전시회이다. 


하지만 가끔은 필요 이상의 정보와 과잉 상술로 인해 관심이 부담으로 탈바꿈되는 장소기도 하다. 만만하게 봤던 결혼 준비에 수많은 선택과 비용이 수반되는 것을 처음 깨닫는 순간이고, 내 아이에게 제일 좋은 것을 해주기 위해 무리한 지출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단점보다 장점이 더 커서일까. 시간이 지나도 매년 끊이지 않고 열리는 것이 두 페어다. 강변 북로를 달리다 보면 큼지막한 현수막이 크리스마스 콘서트처럼 잊지 않고 걸려 있다. 이민 간 지인이 페어에 가기 위해 휴가를 맞춰 들어오는 경우가 있을 정도니, 필수 관문임은 틀림없다.






지난주 토요일, 그 두 번째 문화 충격을 코엑스 1층 전시장에서 이른 아침 맞이했다. 

아내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 오전에 빨리 치고 빠지는 전략으로 전시장에 도착한 시각은 8시 30분. 9시 오픈에 맞춰 느긋이 커피 한 잔을 때리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코엑스 1층 로비를 가득 매운 줄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선착순 00명에게 나눠 주는 선물을 받기 위해 그런 것도 있겠지만,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닌 듯했다. 출산율이 낮은 게 요즘 사회 문제인데, 수치에 오류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임산부들이 줄을 서 있었다. 


정각이 되고 꾸역꾸역 안으로 들어갔다. 자동차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유아용 카시트 섹터가 웅장하게 전면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주변을 아기 옷, 음식, 침대 등 생활 잡화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뒤편 다른 섹터에는 한 번 앉으면 삼십 분 이 훅 간다는 유아 전집 코너가 진을 치고 있었다.



'일단 사지 말고 느낌만 보자!'라고 다짐하며 두 손을 꼭 잡은 채 인파에 밀려 한 바퀴 돌고 있었을까. 개미지옥 같던 전집 코너를 들어가고 있었는데, 배가 크게 나오지 않은 아내를 멀리서부터 점찍으신 영업사원분의 한 단어가 귀에 꽂혔다.


"어머님, 아버님하고 이쪽으로 앉아 보세요. 아직 아가가 태어나려면 좀 있어야 하지만....... "


눈이 마주치면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일부러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걸음을 빨리 하고자 했지만 앞선 단어, '아버님'에 순간 마음이 탁 걸렸다.



아버님...? 


아내는 연신 초롱초롱한 눈으로 속사포 랩을 쏟아 내시는 아주머니께 빨려 들고 있었지만 어쩐지 나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직 세 음절이 귓가에 맴돌았다. 아직 앙팡이는 태어나지 않았는데 벌써 아버지가 되는 건가 싶기도 했고,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훅-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얻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보니, 그곳은 온통 '아버님, 어머님'을 부르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따져보면 나를 부르는 호칭이 네 개 정도 있다. 

회사에서는 과장님, 밖에서는 아저씨(또는 -님), 집에서는 자기(또는 오빠), 가족에게는 아들(또는 야 from누나). 

태어나면서 획득한 신분도 있고 내가 쟁취한 명칭도 있다. 쟁취한 이름은 새롭게 부여받은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익숙지 않다. 특히 회사에서는 진급을 하면 계속 호칭이 바뀌기 때문에 처음에는 나 조차도 입에 잘 붙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님 그리고 아빠는 어떨까?



돌아오는 차 안,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며 아버님, 어머님이 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단지 기분이 이상했다- 정도였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 안에 내재되어 있던 두려움과 걱정을 마주했다.


아직 아빠가 되기에 준비가 덜 되어 있다는 포장 아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불안이 있었고 책임감이 부담이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나에게 아빠가 되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고, 좋은 아빠가 되는 법은 더더욱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의 아빠, 엄마에게 배운 대로 그대로 하면 돼' 또는 '자연스럽게 되는 거야'라는 조언은 그럴 듯 하지만 어찌 보면 무책임한 말이다. 핏덩이 같은 아이를 성장시키는 데 30년 전에 나도 모르게 습득한 대로 하는 것이 적절하지는 않아 보인다. 아이를 키우는 중요한 일을 나는 학교에서, 대학에서, 사회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배우지 못했다는 게 우리는 이해가 가지 않았고 떨떠름할 뿐이었다.


시간을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간다. 엊그제 임신했다고 좋아했는데 벌써 20주를 바라보고 있다. 아내는 조금씩 배가 나오기 시작한다. 난 괜찮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누구의 아들에서 누구의 아버지로 바뀌는 시간. 두렵지만 떨리고 기대되는 삶. 새로운 세상으로 한 걸음 들어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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