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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동이 Sep 13. 2020

#8 정녕 거절감과 친해져야 하는가

임신 13W, 남편들이여 기운 내라



.. 짜잔~. 한 번 잡숴봐. 기막히게 만들었어.

. 으...응.(추릅)

(정적-)

. 오빠 미안... 나 도저히 못 먹겠다.

.. 진짜? 이 정도는 괜찮을 텐데, 많이 비려?

. 응.

.. 그래도 조금만 먹어봐. 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작은 부분 먹어볼래?

. 아니야. 못 먹겠다니까-

(정적-)

.. .... 그래, 그만 먹어. 먹지 마






이놈의 입덧은 끝이 있는 걸까.


퇴근길,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고자 교보에 들렸다. 평소에 자주 찾아보는 '만개의 레시피' 어플리케이션도 훌륭했지만, 이번에는 왠지 책을 봐야 할 것 같았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 전에는 앞서 간 선배들의 노하우를 습득하고자 책을 집어 든다. 요리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아내 기분도 좋게 하고, 이 기회에 요섹남(0-0) 소리도 들어볼까? 하는 설레발도 한몫했다.


평소 머무는 섹션을 벗어나 문구 코너 옆, B. 요리/가정생활 매대 앞을 서성였다. 생각보다 많은 부류의 레시피북에 놀랬지만, 네임드 백쌤과 제2의 전성기를 누리는 옥동자 그리고 유용한 에어프라이어 활용책까지, 총 3권을 구매했다. 두꺼운 책과 비싼 가격에(한 권에 2만 원 가까이 했던 기억이 난다) 한 번 더 놀랬지만, 요섹남을 꿈꾸며 집으로 향했다.


돌아온 주말, 여전히 누워 있는 아내를 뒤로 하고 (나름) 몰래 일어나 불을 켜고 휘발유를 둘렀다. 엊그제 사놓은 돼지고기에 묵은지를 얹어 감칠맛 나는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선사해주고 싶었다. 임신하니 느끼한 것보다 매콤한 것을 선호한다. 그 생각에 평소에 넣지 않은 고춧가루도 넣고, 비리지 않게 만드는 여러 방법을 종합해서 푹~,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아프니까, 더 맛있게 먹고 빨리 괜찮아지길 바라는 마음에 아내의 최애 계란말이도 돌돌 말았다.






결과는 한 숟가락.

딱! 한 숟가락 먹고 아내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전혀 비리지 않은 고기를 비리다며 오만상을 찌푸리는 데 방법이 있을까. 순간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버렸다. 얼굴에 피가 쏠리면서 딥한 짜증이 났고, 무표정한 얼굴로(나는 내가 기분이 나쁠 때 나오는 표정을 안다) 최대한 정색했다. 그대로 차려놓은 밥상을 접었다. 아내는 미안했는지 소파에 누우면서 뭐라 뭐라 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듣고 싶지도 않았고 들리지도 않았다. 미안해하는 소리도 짜증 섞인 소리로 들렸다.(짜증을 냈을 수도 있다)



거절감 때문일까. 대단한 요리를 한 것도 아니고, 정말 힘들게 고생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화를 냈을까. 화를 내면 분이 풀리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반대로 기분이 더 안 좋아지는 스타일이다. 더욱이 임신한 아내에게 화를 냈으니 기분이 편할 리가 없었다. 어찌 보면 아내가 원하는 음식도 아니었고, 해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다가 열이 받은 것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별거 아닌 이 해프닝으로 인한 분노 감정의 꼬리를 찾아보니, 원인이 있었다. 아내의 습관적인 짜증과 내가 느끼는 거절감,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감정의 회로. 즉 아무에게도 위로받지 못한 내 감정이 쌓였던 것이다. 


나도 알고 있다. 머리로는 이해한다. 지금은 평소와 다른 상황이라는 걸. 아내는 하루에 열두 번도 마음이 바뀌고 잠깐 사이에 좋았다 슬펐다를 수십 번 오가는 것을. 짜증을 내고 싶어서 내는 것도 아닐 거고(그렇게 믿고 싶다) 옆에 있는 나를 위로하거나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내의 짜증은 비단 음식에만 해당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아무 문제없던 말투부터, 청소, 에어컨 바람, 빨래, 설거지, 심부름, 부모님과의 관계, 심지어 TV 소리까지 모든 것에 트러블이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서야 했다. 아내를 배려하는 것이 싫은 게 아니라, 계속된 분쟁의 감정들이 해소되지 못하고 입덧이라는 이름 하에 뒤덮이면서 내 감정은 고갈되고 있었다.


남편도 힘들다. 

스스로와 사투를 벌이는 아내만큼은 아닐지라도, 바로 옆에서 방패 없이 서 있는 남편도 정말 힘들다. 인터넷 카페에서 읽었는데 어떤 이들은 입덧이 없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출산 전까지 입덧을 안고 가기도 한단다. 입덧의 행태도 다양한 만큼 입덧의 기간도 여러 가지인 듯했다. 화면을 내리니 '제가 그랬어요! 그게 접니다!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하며 살아있는 댓글이 넘실댄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덜컥 겁이 났다. 이대로라면 내년 2월이 출산 예정인데, 예외적인 케이스가 내가 되지 않길 바란다. 대부분이 곧 끝난다는 또 다른 댓글에 안도와 위로를 받는다. 의도적으로 원하는 댓글만을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랑 말싸움할 기운도 없어서인지 아내와는 계속 대면대면한 상태다. 어쩔 수 없이 이 감정을 일기에 적는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쓴다. 임신 예정인 주변 사람들에게 꼭 알려 줘야지. 남편들, 쉽지 않을 거라고.



결국, 요리 책 세 권은 알라딘 중고 서점에 팔렸다. (by 아내)


내껀 안 먹고 아웃백가서 배터지게 먹었..(빠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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